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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멩이 Apr 15. 2020

속는 셈 치고

김종옥, 거리의 마술사

  여름에 친구와 차이나타운에 간 적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 집에 가려는데 친구가 꼭 사야할 것이 있다고 했다. ‘포춘쿠키’라는 운세를 점쳐주는 종이가 들어있는 과자였는데, 엄지손가락 한마디 크기에 천 원이나 했다. 그런 걸 왜 사냐고 묻자 친구는 ‘속는 셈 치고’ 산다고 했다. ‘속는 셈 치고’라는 말은 묘하다. 그 말에는 자신이 속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속은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가 있다. 이 과자의 가격이 비합리적이지만 비합리적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속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 친구는 과자를 샀고 엄지 한마디 크기 과자에 천 원을 지불했다.

  지금 이 시대에 마술이 진짜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술쇼를 보러 간다. 모든 마술쇼는 ‘속는 셈 치고’, 사실은 속지 않으면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관념적 인식이 도달하지 않는, 육체적인 측면에서는 속임이 일어난다. 머리는 속지 않아도 눈은 분명 속는다. 눈이 속는 쾌감이 있기 때문에 마술쇼를 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란 걸 알지만, 눈은 몰라요. 하지만 그럭저럭 넘어가요. 저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하면서 말이죠.” 신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냉소를 통해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라는 마술사는 자신의 악랄한 수법을 숨기지 않는다. 구성원들은 그 모든 것들이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오히려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과 자신은 상관없다고 착각하며, 그것들에 참여한다. 우리는 속지 않으면서 속는 마술에 걸려있다.

  남우네 반의 아이들도 비슷한 마술에 걸려있다. 존재감이 없었던 남우가 괴롭힘을 받게 된 타당한 이유는 없다. 남우는 나쁜 아이가 아니다. 다만 갑자기 남우라는 아이가 눈에 띄게 되었고, 남우는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이기에 괴롭힐 뿐이다. 태영이는 남우를 때린 이유에 대해 “그냥”이라고 대답한다. 태영이를 포함한 모든 아이들이 남우를 괴롭히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다는 것, 이유는 “그냥”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악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들 눈의 속음, 남우에 대한 무의식적인 증오를 보지 못했다. 저게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럭저럭 넘어가고, 그런 게 몇 번이나 반복돼서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사실 도움을 받아야 했던 건 남우가 아니라, 반 아이들”이였다. 

  아이들의 마술은 남우의 마술로 풀릴 수 있었다. 남우는 진짜 칼을 가지고 태영이를 찌르지 않았으나, 태영이는 진짜 칼을 맞은 것처럼 기절하고, 피를 봤다는 아이까지 나온다. 눈이 속는 것을 무시하고 있었던 아이들에게, 확실하게 눈이 속는 효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 효과를 믿지 않으려 한다. 남우가 했던 것이 속임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이들은 이전과 같이 남우를 괴롭히려 한다. 결국 남우는 더욱 확실한 마술을 보여준다.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지만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일으키는 실제적 효과, 남우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쁜 아이인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이 불러온 결과를 그들 눈앞에 보여준다.

 “남우는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남우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불가능한 도움을 가능하게 했다. 속는다는 것을 알면 속지 않는 것이라는 착각은 부서졌다. ‘속는 셈 치고’ 하는 모든 일들은 실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이지만 동시에 이데올로기를 내파하는 방식이다. 남우가 바닥에 떨어진 이후 ‘그녀’는 “종교는 없지만, 신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건 신에 관한 이야기죠. 우리가 보는 모든 것에 관한.” 결국 무언가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것, 보는 것이다. 그녀는 거리의 마술사가 남우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남우라고 믿고, 뒤를 돌아보는 남우를 본다. 그녀는 속지 않지만 믿는다. “어떤 마법 같은 일은 분명히 그 순간에 일어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녀의 믿음과 응시는 냉소의 이데올로기를 허무는, “정말 마술 같”은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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