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절실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선명한 꿈에서 깰 때 느끼는 감정이다. 꿈에서 깰 때만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니다. 소련이 몰락할 시기 러시아인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은 한순간에 변하고 “구체제의 정적인 분위기에서 살던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혁명’이나 ‘사회주의’같은, 지난 시기 절실했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인과관계를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변화가 모든 것을 바꾼다. 불순한 반체제 작가는 예술성이 뛰어난 작가로 바뀐다. 멘슈코프의 절필 선언에는 이런 도깨비장난 같은 변화에 대한 환멸이 담겨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하고 묻는 것은 부질없다. 암울한 분위기의 신학과 대학원생이 공포소설을 쓰는 스시집 직원으로 변하는 과정을 똑바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리는 존재”이다. 신학과 대학원생이자 무신론자였던 안드레이는 공포소설을 쓰면서 ‘보이지 않는 힘’을 마주하려 한다. 그는 “공포”를 대면해서 “진정한 자신”과 만나고자 한다.
‘나’는 멘슈코프의 집에 머물면서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을 보게 된다. 머리맡에 두었던 노트가 사라지고, 옷걸이에 놓았던 점퍼는 의자에 걸려있다. 창가의 재떨이에는 조금 피우다 만 담배가 놓여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공포소설 혹은 추리소설의 주인공처럼 믿을 수 없는 사실들 뒤에 있는 믿을만한 진실을 찾으려 한다. 예를 들면 이반 멘슈코프는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니라 억울하게 살해당한 것이며 범인은 안드레이라는 진실. 그러한 진실 때문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진짜 같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이 악몽에서 깨어나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에게는 있다.
물론 소설을 끝까지 읽고도 안드레이가 살인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의미심장한 발언은 되짚어볼 수 있다. “알고 보니 자신이 유령이었다는 이야기의 사회적 버전을 혹시 아는가? 인민의 적을 퇴치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처단해야했던 혁명가의 이야기 말일세.” 실제로는 인민의 적인 사람이 자신을 혁명가라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환상, 백일몽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백일몽은 ‘스스로를 처단’하기까지 했다. 마치 꿈에서 죽자 실제로 죽는 소설 속 남자의 이야기처럼,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보면서 탭댄스를 추는 화자처럼, 환상은 실정적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감상적인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물리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안드레이가 정말로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 화자가 본 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수면제로 인한 환각에 불과한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악몽”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악몽은 계속될 것이고 악몽에서 깨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악몽 이후에는 악몽 일뿐이며 삶은 악몽 그 자체이다. 악몽은 “잊히지 않는 단 한 줄의 시”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편소설”처럼 의지와는 상관없이, 끊임없이 나타나 우리를 움직이게 할 것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는”, “알고 보니 꿈이었다는” “상투적이고 허망한” 이야기가 “진정한 자신”이며 진실이다.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절실하게 느껴지는 사실, 물리적 환상을 일으키는 사실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