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한다. 다시 말해 취미의 시대다. 거대담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사회는 해체되었고 각자의 가치가 존중된다. 이를 잘 표현해주는 플랫폼이 인스타그램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먹은 음식, 입은 옷, 방문한 여행지 등의 트렌드를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사회와 상관없는 개인적 일상이 주 관심사가 되는 곳이다. 거대 이데올로기를 추동하고자 하는 열정이 소거된 자리를 채우는 것은 미학화된 일상이다. 한 끼 식사보다도 비싼 7000원의 뉴욕치즈케익을 예쁘게 장식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일을 청년세대의 쓸데없는 사치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과연 사치라 할 수 있을까. 서울의 평균 보증금은 1300만원, 월세는 4~50만원이다. 그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방도 비좁은데다가 방음도 안 된다. 좋은 공간에서 기분 좋은 시간을 누리고 싶다는 마음, 친구와 앉아서 편안히 얘기할 수 있는 대안이란 결국 카페밖에 없다. 사회적 담론이 부재할 때, 경제적으로도 궁핍한 세대는 7천원이라는 ‘작은 사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작은 사치’에도 머무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광장에서, 거리에서 투사가 된다. 나는 3월 6일에 고 황유미 10주기 및 삼성전자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문화제에 다녀왔다. 고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는 10년 넘게 삼성과 싸우고 있다. 그는 발언을 무척이나 잘했다. 총학생회장이나 사회운동가만큼이나 잘했다. 작년 1월 23일 용산참사 7주기 추모제에서는 416가족협의회 유경근 위원장이 발언했었다. 그 또한 황상기 씨만큼이나 발언을 잘했었다. 그들은 투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일까. 원래 말을 잘하던 사람이 우연하게 그런 일을 당한 것일까. 황상기 씨가 발언한 후 상영된 영상에서는 황상기 씨가 ‘우리 유미는’이라는 말로 발언을 시작하는 장면이 수도 없이 나왔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이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이들은 모더니즘적 이유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발전주의로서 모더니즘 시대가 종언을 고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이 남겨놓은 이른바 산업화의 유제遺制들은 아직 과거형으로 말끔히 방부 처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의 해체, 계급투쟁의 종언은 선언되었다. 그러나 해체되고 끝났다고 말해지는 바로 그 사회와 계급 때문에 79명의 노동자는 산재로 사망하고 콜 수를 채우지 못한 여고생은 자살했다. 지식계급층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취존(취미 존중)을 예찬하면 할수록 모더니즘의 잔해, 그 끔찍한 잔해는 잊혀진다. ‘작은 사치’에 머무르며 사소한 일상만을 유지하려 하면 할수록 ‘작은 사치’도 누릴 수 없는, 비일상의 일상을 살고 있는 이들, 삼성본사 앞에서 천막을 치고 차 소리를 들으며 매일 잠들어야 하는 이들은 은폐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이지 않는 모더니즘의 잔해로 유지된다. 만약 역사가가, 문학가, 그리고 작가가 쓰이지 않은 역사, 보이지 않는 역사를 기록하는 이들, 미처 이름을 못 가진 탓에 무시되고 오해받는 존재 목적들과 존재양식들을 복원시키는 이들이라면 그들이 지금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이 모더니즘의 잔해다.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있었던 에라스뮈스를 보아야하는 것처럼,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 있는,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응시해야한다.
황상기 씨는 11년 전 집으로 찾아온 삼성 직원에게 “유미를 산재로 인정해달라”고 말했다. 삼성 측에서는 “아니 아버님이 이 큰 회사 삼성을 상대로 해서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까?라고 답했다. 황상기 씨는 11년 전에도, 3월 6일에도 삼성을 못 이긴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기지는 못할망정 지지는 말아야 된다고 했다. 지지 않겠다고 했다. 우리가 써야할 것들은 이것들과 관련되어있다. 써야할 것을 쓸 때 작가는 작가가 된다.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 것을 쓰는 사람들은 라이터(writer)이지 작가가 아니다. 작가는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