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멩이 Apr 15. 2020

모든 대화는 셋이서 한다

최정화, 인터뷰

 대화는 보통 두 명이 하는 걸로 이해된다. 너와 나. 사람들은 단둘만의 식사나 술자리, 여행에서 서로 간의 진정한 소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인터뷰도 둘이서 진행된다. 인터뷰어와 인터뷰이. 주체와 타자라는, 완결되어 보이는 두 항에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은 대개 방해나 쓸데없는 칩임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이해는, 대화는 양자 간에 서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한 명이 소외될 것이고, 그 소외로 인해 대화체의 불화가 생길 거라는 걱정에서 나온다. 질투나 시기가 생길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는 셋이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건, 양자 간의 대화가 완벽할 것이라는 환상이다. 서로의 말은 잘못 전달되거나 잘못 이해될 수 있다. 논점이 흐려지거나 논의가 어긋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서로에게 숨기기 위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않으려 한다. 소설 초반의 ‘장인’과 ‘아내’의 대화가 그럴 것이고, 삼 년간의 ‘그’와 ‘아내’의 대화가 그랬을 것이다. 이들은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의 불가능성을 숨기려한다. ‘그’가 삼 년 전 이야기를 다시 꺼내려 했을 때 아내가 “여보, 난 당신을 믿는다고.”라 말하며 봉합하는 것이 그러한 예다. 이로 인해 ‘그’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 “일부러 그러지 않았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세상의 모든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해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반가웠을까. 물론 소설 끝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이해는 사실상 몰이해였다. ‘그’와 커플 간의 대화 혹은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은 대화의 도입부부터 알 수 있다. 그들 대화의 시작을 일으킨 건, 그들 사이의 주제가 아니라, 그들의 외부에 있던 소재, 호프집에 흘러나오던 노래였다. 대화는 대화주체들이 아니라 대화주체의 밖에 있는, 그들이 결여되어있는 소재로 인해 시작된다. 물론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노래는 잊혀지는 것 같지만, 사실 그들 대화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그 잔여물이다. 사소한 잔여물로 시작된 부자연스러운 대화가 불화로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남자가 없어지고, 다시 말해 커플이라는 단위에 결함이 생기자, 균열된 커플로서의 여자는 더 이상 ‘그’와 대화할 수 없다. 애초에 그 대화는 “삼 년간의 고통을 한꺼번에 위로받는 시간”이 아니라, 사소한 잔여물로 시작한 사소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 사소한 대화는 조금이라도 균열이가면 깨져버릴 불완전한 대화였다.

 대화는 둘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대화는 셋이서 한다. 너와 나, 그리고 잔여물. 기자가 명함을 건네며 자기 이름을 말할 때, ‘그’의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건 기자의 것이 아닌 창가 쪽 테이블에 앉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거짓 웃음을 지어야하는, 서로 간의 허울에 불과한 인터뷰는 인터뷰 밖의 잔여물과 함께 시작된다. “지나치게 정확한 발음으로 자기가 처한 상황의 부당함을 토로하는” 그 여자의 목소리, 잔여물은 인터뷰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와 인터뷰의 파국을 일으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부당함을 토로하는 목소리 자체가 이미 파국이 육화된 사물이었다. 잔여물은 곧 대화의 불가능성이 구현된 사물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모든 대화는 셋이서 한다. 너와 나, 그리고 대화의 불가능성.

매거진의 이전글 모더니즘의 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