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강욱 Mar 24. 2020

N번방 사태에 대한 단상

2020.03.24. 02:42, 안타까운 어느 새벽.

* 본문에 일부 수정 및 추가 사항이 있습니다.


참담하고 암담하다.


'N번방 사태'같은 혐오스러운 사건이 자꾸 발생한다는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강남역 살인사건, 미투 운동, 신림동 원룸 강간미수, N번 방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간 있었던 사건들은 그 태는 달라도 궤가 같다. 일련의 사건들이 시사하는 것은 겉으로는 페미니즘의 문제인 듯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사실 인권의 영역이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이 글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중 특히 집중하는 페미니즘의 한 면은 다른 차별이나 불합리함이 아니라 '젠더와 상관없이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일한 사회적 안전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일 터다.


부끄럽게도 난 그간 이런 류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어쩔 줄 몰랐고, 바보같이 적극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여성들이 일상에서 피부로 느끼는 온갖 불안과 공포를 직접 겪지 않았으면서 감히 공감한다고 말해도 되나 싶었고, 내가 여성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그들의 입장을 아는 체하며 목소리를 내는 것이 오히려 젠더 갈등을 심화하거나 혹은 (인지하지 못하면서 저지르는) 또 다른 사회적 폭력이 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서였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혹 여성들의 입장을 왜곡하거나 문제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은 아닐까 많이 걱정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런 끔찍한 일들이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은 아직도 이 시대를 사는 꽤 많은 남성들이 이런 문제들을 '함께 해결해야 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여기지 않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저 사건들은 나와 분리된 타인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안일함 때문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내가 느끼고 성찰한 기록이다. 여전히 여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전제가 있다. 글에서 틀린 점이 있다면, 그리고 더 깊이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비판은 달게 수용할 터다. 그리고 분명히 이 글에서 내가 다루지 못하거나 놓치는 문제들도 정말 많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해하고 생각한 범위에서만이라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명료하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가, 나의 연인이, 나의 반려자가, 나의 여동생이, 나의 누나가, 나의 딸이, 나의 손녀가 내가 지금 느끼는 것과 같은 사회적 안전함을 느끼고 한 인간으로서 걱정 없이 사는 세상이었으면 한다.



*****



"아니, 너네가 직접 당한 것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까지 난리야."

: 이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이 화제가 되었던 때, 회사 상사로부터 들었던 말이었다. 그 사람의 말은 '60-70년생들이 겪었던 것에 비하면 지금 세대의 여성들의 상황은 많이 나아진 거 아니냐. 정작 더 많은 차별과 불행을 겪은 세대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었는데 왜 온갖 불행과 차별을 다 겪은 것처럼 난리냐'는 거다.


우리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최소한 근현대부터 지금까지의 시대가 철저하게 남성 중심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남성들은 본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차별이라고 여길 겨를도 없이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들이 이런 문제에 가져야 하는 기본적인 전제가 여기서 나온다.


'내가 열심히 알려고 노력해도 여성들이 겪고 있는 불합리함과 차별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


이 전제 때문에 남성들은 100%에 가깝게라도 내가 사랑하는 내 어머니가, 연인이, 반려자가, 딸이 느낄 '수도'있는 문제를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모든 여성들은 꾸준히 그들의 불합리함과 차별에 대해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대에 분노하고 저항해왔다. 지속된 분노와 저항으로 선거권을 확보했고, 여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부 부처가 생기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게 된 거다. 이제야 이런 문제를 입 밖으로 내고, 공론화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결코 이전 세대가 불만이 없어서 가만히 있고 넘어갔던 게 아니다.


여성들이 이제야 문제라고 이야기한 것들은 지금껏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한 사회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낯선 담론이다. 남성들이 정하고 짜 놓은 제도와 관습, 사회적 질서에서는 애초에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예컨대, 언어적 성희롱이나 '여자가 말이야'로 규정하는 젠더 역할 등이 그렇다.


처음에는 '사회적 문제'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딸 같아서...", "다 그렇게 사는 걸..."이라는 변명으로 넘어가졌었다. 하지만, 그걸 당하는 입장에서 그게 얼마나 수치스럽고(수치스럽다는 표현은 '다른 사람들을 볼 낯이 없거나 스스로 떳떳하지 못한 느낌이 있다.'는 사전적인 정의를 담고 있으며 이는 자의적인 잘못에 느끼는 감정이라는 의견이 있어 수정합니다.) 두렵고 혐오스러웠는지 끊임없이 세상에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야 위와 같은 변명을 하는 사람들에게 무지하고 잘못됐다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N번 방 사태를 비롯하여 미투 운동이나 강남역 살인 사건 등의 문제에 대해서도 '본인들이 당하지 않은 일임에도' 여성들이 격노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1. 내가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는 불안함

2. 그 불안함 때문에 세상에 목소리를 내도 '너희가 직접 당한 것도 아닌데'라고 말하는 사회적 무관심 혹은 오히려 그런 여성들을 과민 반응하는 것처럼 보는 적지 않은 사회적 시선

3. 그리고 여성으로서 자신들이 이 사회에 느끼는 불안에 대해 열심히 목소리를 내도 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는 공포


*****


"내가 그런 일을 벌인 게 아니야. 그런데 왜 나까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하지? 그건 무고한 남성에 대한 사회적 폭력이야"

: 사실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가장 커다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말 자체는 맞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건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사건들이 그들의 삶에 실재하는 공포다. N번방과 같은 극악무도한 사건은 차치하더라도 리벤지 포르노, 지하철 치한, 스토킹 등이 그렇다. 이미 우리는 많은 여자 연예인 유출 사건이 있었다는 걸 안다. 최근 미투 운동이 나오고 나서야 나는 주변 여자 지인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지하철 치한에 대한 이야기가 정말 어쩌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고, 당장 어제도 오늘도 그들이 겪었던 일일만큼 빈번한 일이라는 점이다. 스토킹과 비슷한 문제도 신림동 원룸 강간 미수 사건 등을 통해 우리가 이미 목격한 바 있다.


이런 문제들이 여성들이 피부로 느끼는 공포다. 그럼에도 '그게 흔히 일어나는 일도 아니고...', '너희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고...'라고 말하는 건 남성들이 저런 일을 겪을 일이 정말 희박하고 겪은 일도 아주 드물기 때문이다. 내가 겪어본 적 없으니 저 공포에 공감하지 못하는 거다. 그리고 실재하는 공포만큼 이런 사회적 비공감이 또 다른 공포인 셈이다.


법은 기본적으로 생존과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한다. 예를 들어, 살인당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살인이 잔인한 범죄라는 사회적 합의가 있고, 그 사회적 합의에 걸맞은 법과 집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나 화가 난다고 타인을 죽일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칼을 맞을까 봐 걱정하며 살지는 않는다.


지금 여성들의 분노는 실재하는 공포가 있고 이로부터 안전하고 싶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표현이 격해지고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공포를 공감하지 못하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다.


반면, (요즘) 남성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에 대해 벌을 받는 느낌인 셈이다.


5,000만 국민 중 절반이 남성이라고 가정하자. 그중 N번방 사건에서 밝혀진 대로 해당 영상을 보기 위해 결제를 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남성을 20-50대로 한정해서 대략 2/3이라고 가정해보자.(그럼 대충 1,666만 명 정도다.) 그렇다고 해도 N번방 사건에 가담한 26만 명에 속하지 않은 남성이 훨씬 많다.


요즘 SNS를 보면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가해를 하는 겁니다.', '내 주변에도 26만 명 중에 누군가가 속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역겹고 소름이 돋는다.' 등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저 말들도 이해가 되는 이야기다. 앞서 말했듯, 동등한 사회 구성원인 여성들의 공포에 무관심한 것은 곧 사회적 문제를 방관하고 해결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하지 않는 셈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실제로 누가 26만 명 중 하나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의심하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글을 접하는 26만 명이 아닌 남자들은 저런 글들을 보며 '남성이 공격받는다. 그리고 나도 남성이다.'라는 생각으로 방어기제가 생기고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자신들에게 '잠재적 성범죄자' 혹은 '역겹고 소름 돋는다고 의심받을 수 있는 사람'의 프레임이 씌워지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에 예로 든 SNS 사례는 그 대상만 바뀐 채, 다른 사회 현상에 대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족, 중국인, 무슬림, 해외 난민, 특정 종교 등 정도와 양태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실 모든 조선족, 중국인, 무슬림, 해외 난민, 특정 종교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들을 꺼려한다.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앞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여성은 그 정도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안전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변화의 속도가 더디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안전을 외치지만 외면받기도 하기에 격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남성은 N번방의 가담자들, 신림동 원룸 강간 미수 사건의 피의자, 리벤지 포르노의 유포자가 아님에도 '언제 그럴지 모르는 남성'이 되는 억울함을 겪는다. 양 쪽 입장은 동시 발생한 두 개의 현상이다.



*****



남성으로서 이런 이슈에 '우리의 문제'라고 여기며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남성으로서 '언제 내게 위협이 될지 모르는 남성', '혹시 나를 파괴할 수도 있는 남성'으로 누명을 쓰지 않는 방법과 동일하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같은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해왔는지 우리는 안다.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이토록 사회에 분노하는 이유도 '남성과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로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다면 우리는 여성들이 바라는 사회적 안전함에 무관심할 수 없다. 내 문제, 우리의 문제라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인 셈이다. 즉, '남성들이 겪지 않는 일부 여성들의 문제'가 아니라 젠더 관념에서 벗어나 '사람이라면 누구도 겪지 않아야 하는 문제'로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일부 남성들이 저지른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남성들이 함께 분노해야 하는 이유고, 잠재적 범죄자 혹은 방관자로 낙인찍히지 않는 방법이다.


이 글이 덮어놓고 여성의 편을 드는 글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최대한 감정적인 부분은 덜어내고 치우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글을 쭉 읽었다면 답답하고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많겠지만 아마 양측의 입장이 어느 정도는 공감되리라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가 주인 시대에서 나고 자란 한 명의 남성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변화하려 애쓰지만 모자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사회적 문제에 누군가는 이런 나조차도 여전히 잠재적 범죄자나 방관자로 볼지 모른다. 나 역시도 한편으로는 억울하다. 일부 여성들이 모든 남성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격렬한 혐오발언을 하는 것은 좀 삼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한 개인으로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그런 공격적인 태도나 혐오발언이 나오지 않을 만큼 동등한 사회 구성원인 여성들의 입장을 공감하고 그들이 남성들이 느끼는 것과 동등한 사회적 안전을 위해 함께 행동하는 일이다.


부디 오늘의 분노가 내일의 공감이 되고 모레의 연대가 되어 멀지 않은 미래에는 공존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의 이전글 도망을 가볼까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