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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10. 2020

나와 너, 우리

19. 07. 30 스반홀름 45일차(덴마크86일차)

따뜻함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은 그런 포근함을 자주 마주치는 일상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다. 오늘은 기온뿐만 아니라 습도까지 높아서 꼭 한국에 있는 것처럼 땀이 났다. 이런 날에는 크게 몸을 쓰지 않아도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겹다. 밭은 거대한 찜솥처럼 뜨거운 증기가 고여 있었다. 이런 날에는 개구리도 흙 속으로 몸을 숨긴 채 나타나지 않는다. 지친 얼굴의 우퍼들만 잡초를 부여잡고 만두처럼 쪄지고 있었다.


요즘 같아서는 이곳 생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한낮의 밭에서 견딜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에 부칠 때면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이쯤 하면 돌아가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 솟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언제나 자괴감이 함께 뒤따른다. 나는 겨우 이 정도의 일을 하면서 이렇게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가. 그럴 때면 항상 몸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난다.




오늘은 굿바이 커피(Goodbye coffee) 타임이 있는 날이다. 며칠 내에 베지터블 그룹 발런티어들이 뭉텅이로 나가는 탓에 한 번에 다 같이 굿바이 커피를 하기로 했다. 커피와 와인, 케이크와 과자 같은 것들을 준비해와서 패킹홀에 모여 앉았다. 언제나 게스트들이 있는 스반홀름에서는 귀한 일손이 되어주고 돌아가는 게스트들에게 잘 가라는 인사와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팀별로 굿바이 커피를 마시는 시간을 열었다. 마지막 일을 마친 후 팀 직원들과 게스트들이 모여 앉아 인사를 나누고 스반홀름 기념 티셔츠를 선물했다. 특별히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쿠키와 케이크를 구워와 굿바이 선물로 나눠 먹기도 했다. 단 며칠 머무른 게스트일지라도 잠시나마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돌아가는 이의 앞날을 응원했다. 스반홀름 기념 티셔츠를 건네줄 때면 모두 한 마음으로 설레하며 소리치고 박수쳤다. 매번 똑같은 티셔츠와 장면이었지만 남아 있는 이들에게는 아직 받지 못한-언젠가 받게 될- 선물이고 떠나갈 이에게는 아쉬움과 뿌듯함이 가득 담긴 기념품이었다. 모두 알고 있지만 매번 등 뒤로 숨겼다가 놀랐지! 하는 표정으로 티셔츠를 꺼내는 주민들이나 매번 처음인 듯 다 함께 놀라주는 게스트들이나 어쩐지 애틋했다. 티셔츠는 ‘이별’이 내재된 선물이었으니까. 티셔츠를 주고받은 뒤에는 주민들과 게스트가 오랫동안 꼬옥 안고 인사를 속삭였다.




처음 굿바이 커피에 참석했을 때의 낯섦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국적도 성별도 연령대도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그 시간이 부담스럽고 불편했다.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반이 흘렀을 뿐인데 이젠 그 누구의 곁에 앉아도 불편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대놓고 다가와 둘러앉아 있는 이들을 보자 새삼 다정한 마음이 번졌다. 한쪽에서는 시슬과 프란시가 호스를 들고 서로 물을 뿌리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시슬이 나를 보며 함께 하자, 고 손짓했고 나는 모자를 벗고 뛰어들었다. 물줄기를 맞으며 나는 더 이상 이들을 단지 외국인이 아닌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원활한 언어 소통을 하지 않아도 함께 먹고 얼굴을 마주하며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교감하고 있었다. 나의 오랜 역사를 알고 있는 친구들과 말없이 함께 있는 순간만큼이나 이들이 눈을 마주치면 ‘hey’하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순간도 포근했다. 따뜻함을 가진 이들과 함께 사는 것은 그런 포근함을 자주 마주치는 일상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혼자서는 만들기 힘든 따끈한 무언가가 가슴께에 조그맣게 번지는 기분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자 책상 위에 무언가가 올려져 있었다. 흰 편지봉투 겉면에는 ‘2주년’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쇠얀과의 시간이 2주년을 맞이하는 동안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떠나오기 전까지 장거리 연애를 하고 있던 탓에 기념일들을 거창하게 보내진 못해도 소소하게 축하했다. 여행을 떠나와 함께 일상을 보낸 지도 어느덧 4개월에 접어들었다. 나는 그와 함께 하는 일상에 익숙해졌고 때론 그의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도, 나의 예민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그 또한 이전에 내가 봐온 모습과 다른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한결같았고 지금도 여전히 처음 만난 그때의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을 함께 하고 있지만 여행 중이라는 사실과 돌아가면 또다시 긴 거리를 두게 될 현실을 상기하며 하루하루를 뜻깊게 보내고 있다. 그 덕분인지 2주년이라고 내게 특별히 다른 감흥은 없어서 그저 다른 날보다 좀 더 맛있는 음식을 해 먹을까 하는 정도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는 역시 여전히 내가 알던 그다웠다. 잊지 않고 몰래 쓴 편지를 읽으며 결국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밀접한 거리에서 일상을 함께 지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크고 작은 문제들을 겪으며 그가 내게 다 드러낼 수 없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리가 싸우고 삐걱거리는 동안에도 그는 우리가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내게 그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조용히 나를 안아주며 토닥이는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지금 나의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동력은 그와 함께 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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