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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Jun 09. 2020

개구리 극복기

19. 07. 24 스반홀름 39일차(덴마크80일차)

저 작은 몸들은 내게 아무 감정도 위해도 가하지 않은 채 그저 있을 곳에 있을 뿐이니까 그걸 발견했다고 해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자고.





본격적인 여름 더위에 들어선 밭은 도시에서 만나보지 못한 열기로 가득하다. 그늘 하나 없는 넓고 푸른 밭은 넘치는 생명력만큼이나 숨통을 틀어쥐는 뜨겁고 밀도 높은 공기가 가득 차 있다. 밭 한가운데서는 숨을 돌릴 틈이 없다. 



위딩 웨건. 트랙터 위에 판을 이어 그 위로 엎드려 구멍 아래로 손을 뻗어 잡초를 뽑는다.



이런 날이면 ‘위딩 웨건(Weeding wagon)’이라 부르는 직접 제작한 기계를 타고 일하거나 최대한 밭가의 그늘진 쪽에서 일한다. 위딩 웨건은 트랙터 뒤에 쇠막대를 용접해 만든 구조물을 매달아 구조물 위에 사람을 태우고 잡초를 뽑는 기계다. 머리 위에는 천막을 씌워 햇빛을 가리고 아래로는 구멍을 뚫어 바를 덧대고 바 위로 사람이 엎드려 트랙터로 달리면 사람이 손으로 빠르게 잡초를 뽑는다. 처음 위딩 웨건을 타고 작업했던 날 쇠얀은 단단히 기분이 상한 채 돌아왔다. 위딩 웨건은 그늘 한 점 없는 밭 가운데서 천막으로 인공 그늘을 만들고 사람 대신 트랙터로 움직이며 여름날 작업하기 좋도록 주민들이 손수 제작한 것이라고 했는데 실제 위딩 웨건에 올라 트랙터의 빠른 속도를 감당하며 정신없이 잡초를 뽑다 보면 마치 잡초 뽑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무릎 높이로 웃자란 잡초들에 얼굴이 쓸리고 급하게 잡초를 쥐고 뽑으려다 가시에 찔리기도 하는데 아무리 그늘 아래 직접 몸을 움직이지 않고 넓은 밭을 가로지르며 작업할 수 있다 해도 별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그 속도가 인간의 속도를 넘어서는 것이어서 어느새 인간성은 지워진 채 기계의 한 부속품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도 정확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부품. 그렇게 거대한 밭의 한 줄을 달리고 나면 어깨와 허리와 목 어디 하나 안 쑤시는 데가 없다.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옆에 함께 누운 사람들 덕분이다. 방학을 맞아 마을 일을 돕기 위해 밭으로 나온 청소년들과 우퍼들이 시끄럽고 경쾌한 음악을 광광 틀어놓고 몸을 들썩이며 신나게 잡초를 뽑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인 채 정신없이 잡초를 뽑다가도 자신이 맡은 라인에 뽑을 게 별로 없으면 옆 라인을 도와주기도 하고 잠시 허리를 펴고 쉬는 동안 트랙터의 속도를 즐기며 춤췄다. 스반홀름의 여름 밭은 고요와는 거리가 멀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태양이 머리 높이 떠오르면 밭 가의 나무 아래 최대한 그늘진 곳에서 작업을 계속한다. 그때부터 나는 나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바로 개구리와의 전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무성한 풀무더기 아래 수많은 개구리와 지렁이, 민달팽이가 서식하고 있다.



밭에는 수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 그러니까 수많은 종류의 개구리가 ‘밭’에 살고 있다. 개구리가 언제부터 밭에 살았던가? 비가 한 차례 지나고 나면 그야말로 개구리 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개구리가 출몰한다. 물기를 머금고 다양한 작은 곤충과 생물이 사는 흙 속은 개구리에게 천혜 비옥한 삶터였다. 두꺼비처럼 뚱뚱하고 몸집이 큰 개구리부터 청개구리, 잡초를 뽑아내면 흙 속에 진흙 덩어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햇볕을 피해 슬금슬금 자리를 옮기는 땅개구리까지…… 그만해야겠다.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발끝까지 진저리가 쳐진다.


나는 세상 누구와 대결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개구리 혐오자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굳이 꼽아보자면 초등학생 시절 뒷산에서 잡아 온 개구리를 양철 사탕 통에 넣어 사탕 먹으라며 건네주었던 녀석들에게 속아 눈앞에서 개구리가 튀어 올랐던 일이거나 그렇게 도심에 풀려난 개구리가 폴짝 뛰어 귀가하는 내 종아리를 스쳤던 때의 느낌에 대한 공포 때문일 거다. 어쨌건 개구리라는 단어를 이렇게 많이 써본 일도 처음이고 개구리 사진도 못 보는 엄청난 개구리 공포증에 걸린 내가 매일 예고 없이 여기저기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개구리를 만나는 일은 정말 너무 에너지를 소모시켰다. 모두가 좋아하는 물기 서린 선선한 아침 밭도 두려웠고 전날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밭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해가 쨍쨍한 한낮이라도 그늘 아래는 어김없이 작고 미끈한 몸뚱이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모두들 더위를 피해 그늘 속으로 쏙쏙 뛰어들 때 나는 한없이 느릿느릿 발을 옮기며 수천 번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어느새 스스로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들 좋아하는 작고 귀여운(?) 저것을 견뎌보자고. 어차피 피할 수 없다. 이 넓고 큰 밭에서 저 작은 것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면, 언제든 어디에든 개구리가 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해보자고 주문을 외웠다. 어차피 있다, 언제나 있다, 내 눈에 띄지 않았을 뿐, 나와 무관하게 그냥 있다. 그냥 그 사실만 받아들여 보자고. 저 작은 몸들은 내게 아무 감정도 위해도 가하지 않은 채 그저 있을 곳에 있을 뿐이니까 그걸 발견했다고 해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자고. 나도 그저 있구나, 하고 시선을 돌리고 말자고. 종일 나는 그 주문을 외며 잡초를 뽑아낸 자리에서 무심히 시선을 돌리고(금방 저기에 작은 땅개구리가 있었어, 슬그머니 움직여서 흙 사이로 파고드는 걸 이미 봤지만 안 본 것처럼 마음을 다독이자) 별 일 아니라는 듯 나아갔다. 그렇게 밭에서 한나절 시름하고 돌아오면 정말 녹초가 됐다. 내게 농번기의 밭은 더위보다 나와 다른 작은 생명체를 인정하는 일과의 사투였다. 물론 지금도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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