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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ug 21. 2020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비생산적 생산자들의 증언

김보라, <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스리체어스, 2018

소속되지 않은 자의 아침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렇다 할 성과 없이 또 새로운 해를 흘려보내며 지푸라기 잡듯 썼던 <저기요, 선생님?>이라는 산문집에 실은 글이다. 

    


드라마 <미생>의 하루는 미세하게 균열된 시간으로 나타난다. 이른 아침,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직장인 군단의 매서운 발걸음과 그들을 거슬러 집으로 돌아가는 주인공의 방황하는 눈동자가 부딪친다. 누군가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누군가에겐 하루를 마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간은 모두에게 다른 상대적인 흐름을 갖고 있다. 문제는 그 다름을 느끼는 이가 군단을 거스르는 이뿐이라는 것이다. 오로지 주인공만이 자신이 거스르고 있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를 의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간은 군단을 거슬러 올라가는 왜소한 이에게만 상대적이다. 한 곳을 향해 숨 가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시간은 확고하다. 그들의 시선처럼.

김지현, 『저기요, 선생님?』, 네시오십분, p.115     



학교나 직장, 어떤 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건 수많은 질문 세례를 받으며 사는 것이었다. 자기소개나 이력, 단순한 가입 절차에도 ‘소속’이라는 빈칸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이 사회 안에서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거나 소속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자만을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해주었다. 자기를 소개하는 과정에서는 소속을 말하면 손쉽게 소개가 됐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개별성을 만나기보다 도식화된 집단의 소속원으로 만나길 선호했다. 개별적 존재는 많은 설명이 필요했고 애정을 갖고 그 자질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내게는 ‘등단’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등단 전과 후의 생활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삶은 천지 차이로 달라졌다. 지망생 시절에는 “무슨 일 하세요?”라는 질문이 그렇게나 공격적으로 들렸는데(이 일화도 책에 썼다) 이제는 조금은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다.


<등단 전>

“무슨 일 하세요?”

“글을 써요.”

“우와 작가세요?”

“작가는 아니고…….”

“아, (말을 돌린다)”     


<등단 후>

“무슨 일 하세요?”

“글을 써요.”

“우와 작가세요?”

“네.”

“무슨 글 쓰세요?”

“소설이요.”

“우와, 소설가에요? 신기하다!”


내가 나를 설명하기도 이렇게나 껄끄러운데 부모님들은 더했다. “네 딸 뭐하노?” 하는 물음에 등단 전에는 밑도 끝도 없이 “공부한다.”하고 대답하던 아버지는 등단 후에 어딜 가면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내 딸 작가요.” 하고 먼저 말한다. 사회로 확장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지망생 시절에는 글을 쓰기 위한 제반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책을 썼던 당시에는 낮에는 대안학교 시간 강사, 저녁에는 만화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를 전전해야 했는데 등단이라는 타이틀을 얻고 나니 ‘예술인 활동증명’이라는 걸 통해 공인을 받고 온갖 지원금을 신청할 수 있었다(생계를 위한 생활자금부터 대출까지 가능하다). 시간 강사며 아르바이트며 내게는 모두 글을 쓰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도 ‘생산’을 위한 시간이라고 인정해주지 않았다. 지망생일 때는 책 읽는 행위가 ‘취미’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업무로 ‘봐준’다. 예술가도 사회적으로 승인을 받아야 했다. 나는 이제 ‘예술인’에 소속된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소속된 삶은 타이틀 빼고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직장에 소속된 사람은 ‘월급’이라는 든든한 보장이 뒤따르지만 예술가가 예술인 등록을 한다고 해서 매달 돈이 턱턱 나오는 거나 갑자기 예술적 능력이 고취되는 게 아니다. 예술인 등록을 마치고 ‘공식 예술인’이 된다고 해도 글을 언제나 안 써지고 내가 정말 글 쓰는 데 능력이 있는가 하는 의심과 자책은 비공식 예술인이던 시절보다 더 크게 짓누른다. 오히려 심적 부담감은 더 커지고 능력은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데 주변 사람들의 인정만 허물처럼 껄끄럽게 걸쳐져 있다. 지망생 시절에 그토록 갈구했던 그 인정과 이해가 풀 먹인 새 옷처럼 거칠게 피부에 닿는다.     



윤아: 심리적으로? 어…… 저 섬 같아요. (웃음) 어차피 다 제가 해야 되는 거라서, 누가 해결해줄 수는 없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 쓰는 거는 개인 작업이니까요. 작업이 잘돼서 집중할 때도 섬이 되는 거고, 잘 안되고 힘들 때도 섬이 되고. (p.99)     



글을 쓰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혼자 수행하는 시간이므로 글이 술술 잘 써지고 몰입도가 올라가는 순간에도 섬이 된다. 내적인 차원에서의 섬이다. 외부의 시간과는 무관한 시간이 내 속에서 무한대로 흐르고 물리적인 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되는 순간. 그때의 고립감은 굉장한 희열을 동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외부적으로 섬이 되어 살아간다. 모두가 잠든 밤, 날이 새도록 글을 쏟아내고 느지막이 아침을 맞이하는 그 시간의 흐름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에서 인정하는 삶의 시간은 아침이면 일터로 나가고 저녁이면 내일 일하기 위해 잠자리에 드는 게 공식이다. 예술은 패턴을 비집고 터져 나오는 과정이므로 공식대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 시간을 견디는 건 오롯이 혼자만의 몫이다. 


그 시간에 관해 구구절절 기록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세상은 공인되지 않은 삶에 대해 이해할 생각이 없다. 소속 없는 자는 이해할 수 없는 자와 동의어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건 어떤 의의가 있나. 그들의 증언은 어떤 가치를 지니나.      



서로의 작업에 개입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지망생의 느슨한 연대는 긴 항해를 견뎌 낼 수 있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원동력이었다. (p. 101)     



감독 지망생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인터뷰한 저자의 시선은 담담하다. 이제는 <벌새>(2018)의 감독으로 유명해진 글쓴이는 자신이 인터뷰하고 있는 열다섯 명과 비슷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이들의 이야기를 잘 알고 마음 깊이 공감하는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그런 자리에 서 있다 보면 모든 말이 극적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그들의 지난함을 한 권의 책으로까지 엮어내는 이의 마음이란 어쩔 수 없이 그렇다. 하지만 한 발만 물러서면, 그 지난함은 지루함이 되기 십상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말은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하는 한숨보다 “누구나 힘들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냐(그러니 너는 힘들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 라는 소통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세상은 소속된 자의 고충(직장 생활의 고단함, 직장 내 인간관계에 대한 피로감, 월급쟁이의 한탄 등)에는 무한한 공감과 이해를 베풀면서 소속되지 않은 자의 고충에는 싸늘할 만큼 마음을 닫고 있다. “그런 삶을 택한 건 너야.” “그러니 그렇게 살면 안 돼.” “그게 힘든 거냐. 진짜 사회생활을 안 해봐서 모른다.” 등등. 목구멍으로는 삼켰을지 모르나 얼굴에는 다 드러나던 그 무심함들. 글쓴이는 그 얼굴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들의 구구절절함과 지지부진함에(서사 없음에) 애달픈 옹호를 보태는 순간 울타리 안쪽 사람들의 얼굴은 싸늘하게 식어갈 것이므로. 이 책은 소외된 자들의 신파가 아니라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개별적 존재들에 대한 담담한 증언이다. 그리고 이 증언의 목적은 애초에 이해할 생각이 없는 이들의 몫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하는 자들의 연대를 위한 장이다. 


부산작가회의에서 발행하는 문예지 <작가와 사회> 속 ‘작가의 일일’이라는 코너에 글을 실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작가의 생과 업, 작가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취지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가’라는 소속을 얻었지만 예술가들의 삶은 안정을 보장 받지 못하므로 도대체 어떻게 삶과 문학을 이어나가고 있는가는 알 수 없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의 분투를 생생하게 듣는 것만으로도 나의 분투가 우리의 분투가 된다. 그 순간 철저히 섬이 되어 걷고 있던 이 길이 멀지 않은 곳에서 희미하게 불을 밝힌 걸음들로 가득 찬다. 그래서 증언은 필요하다. 아직 포기하지 않고 걷고 있는 이들의 지속을 위해, 내가 계속 걷기 위해.


그러므로 이들의 증언은 TMI일 수밖에 없다. 공인된 자들은 소속의 명칭만으로 모든 이해를 동반하므로(혹은 이해의 노력을 수반하지 않아도 되므로) 단답으로 가능하다. 카테고리에서 고르면 된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카테고리의 최하단, 결코 하나로 갈무리할 수 없는 수많은 삶에 씌워놓은 ‘기타’의 삶이다. 손쉽게 카테고리를 추가하는 대신 ‘기타’를 풀어 ‘자발적 비-소속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듣는 행위가 주체적인 행위가 될 때 그 어떤 조언과 가르침보다 더 큰 삶의 지속을 위한 힘이 될테니까.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413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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