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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Dec 22. 2019

목소리들의 연대―<82년생 김지영>

82년생 김지영, 김도영 감독, 2019

남동생의 결혼식을 치렀다. 덴마크로 떠나오기 전 가족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며 나는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리라 이야기를 나눴다. 큰 결심으로 꽤 장기간 떠나는 여행길이었고 갑작스레 진척된 집안일로 내 계획을 변경할 수 없다는 것에 모두 공감했다. 동생은 서운한 기색도 없이 자기 때문에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고 부모님 또한 아쉬움을 표하긴 했지만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우린 미리 축하의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로부터 약 6개월 뒤, 나는 어느새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 있었다.


하나뿐인 동생의 경삿날을 축하해주고픈 마음이 우선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돌린 건 엄마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간간이 엄마와 통화하며 결혼 진행 상황을 전해 듣는 동안 마음 한쪽에 외면할 수 없는 어떤 우려가 점점 자랐고 결혼식 전날 집에서 치르게 될 잔치가 끝내 나로 하여금 티켓을 끊게 만들었다. 엄마가 혼자 짊어지고 있는 많은 일들이 마치 나의 일, 딸의 일, 여자들의 일, 우리의 일로 느껴졌다. 그 모든 걸 엄마 혼자 감당하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가족끼리 짧은 만찬을 하고 본격적으로 잔치 준비에 돌입했다. 아버지 쪽 가족들은 자식들의 혼사를 치를 때면 식 전날 당사자 집에 모두 모여 저녁을 먹으며 얼굴도 보고 덕담도 하는 자리를 가졌다. 그게 ‘전통’이었다. 아버지는 9남매였고 형제들과 그의 배우자만 모여도 집은 가득 찼다. 그렇게 모일 때면 대가족의 끈끈한 정과 ‘우리 가족’의 가족애가 더욱 증폭됐다. 물론 아버지에게는 톡톡히 그랬다. 아버지는 많은 형제들과 끈끈한 정을 뿌듯해하며, 또 일을 치를 엄마에게 미안해하며 ‘적당히’, ‘구색’만 맞춰서 식사를 준비하자고 했다. 아버지와 30년을 살아온 엄마는, 아버지네 가족과 30년을 함께 하며 살아온 엄마는 구색에 대해서 잘 알았다. 국과 밥을 기본으로 나물 서너 가지, 명태전이며 동그랑땡 같은 간단한 전 몇 가지, 안동 사람들이 제사나 잔칫날이면 꼭 준비하는 문어 숙회와 수육, 식사 후에 다과로 나갈 과일 몇 가지와 떡과 단술, 술과 커피.


물론 아버지가 고리타분한 옛 가장은 아니므로 이 모든 걸 엄마 혼자 만들어내길 바란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부지런히 엄마의 주문에 따라 시장에 가서 과일이며 떡이며 필요한 것들을 사다 날랐다. 하지만 그 모든 지시, 필요한 것들의 목록, 어느 떡집의 무슨 떡, 특별히 수육이 주문 가능한 정육점의 위치 같은 것들은 엄마 손에서 이뤄졌다. 우리의 머릿속엔 그와 같은 지도가 없었고 엄마는 평생을 바쳐 그 지도를 그렸다. 나는 엄마의 내비게이션에 따라 마트를 가리키면 마트로, 재래시장을 가리키면 재래시장으로 바쁘게 다녔다.


엄마는 나와 아버지가 무언가를 날라오는 동안 ‘식사 준비를 위한 준비’를 했다. 대량의 맥주를 냉장고에 넣을 수 있도록 냉장고를 정리하고 많은 사람들 몫의 그릇들을 꺼내 씻고 집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적당히 구색을 맞춘 음식을 잘 내어놓는 것만큼 깨끗하고 정갈한 살림 상태를 보여주는 것 또한 ‘엄마-아내-며느리(-딸)’의 이름에 할당된 몫이었다. 그게 ‘김연경’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에게 할당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 날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날, 잔칫날, 아버지네 가족들의 잔칫날, 엄마와 다르지 않은 짐을 지고 사는 이들, 엄마-아내-며느리(-딸)들의 의기투합을 나는 조금 경이롭게 지켜봤다.


부산 큰아버지의 배우자인 큰어머니는 며칠 전부터 직장엘 다니며 잔치를 치룰 엄마를 걱정하며 나물 다섯 가지를 손수 준비해왔다. 엄마의 직장 동료이자 그 역시 어머니인 친구분은 결혼을 축하하며 갓 담근 김치를 가져다주었고, 서울과 안동에서 내려온 사촌 언니와 사촌 올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팔을 걷어붙이고 상을 차리고 빈 접시를 수시로 채우고 뒷정리를 했다. 여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음식을 담아내며 목소리를 낮추고 “일회용 접시에 담아.”라고 말했다. 그 많은 설거지를 내다보고 걱정하는 것은 여자들뿐이었다. 사촌 올케는 설거지를 하는 내게 멀리서 와서 설거지나 해서 어쩌냐, 말했고 큰어머니는 그래도 네가 와서 너희 엄마가 참 다행이다, 했다. 여자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돌림노래처럼 엄마를 향해 얼른 와서 밥 먼저 먹으라고 계속 말했고 사촌 언니는 불호령이라도 내리듯 내게 “너희 엄마 밥 좀 먹여.”라고 말했다. 큰아버지와 삼촌들과 사촌 오빠들의 웃음소리, 농담, 화기애애한 분위기, 동생을 대견해 하는 아버지보다, 나는 그 날을 여자들의 빠르고 긴밀하고 단단하던 ‘연대의 날’로 기억하고 있다.


정신없이 일을 치르고, 엄마는 이제 시어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딸과 여동생으로 자랐고 아버지의 아내가 되었고 아버지네 부모의 며느리가 되었고 아버지네 형제들의 제수씨, 형수가 되고 동서와 형님이 되고, 올케가 되고 나와 동생의 엄마가 되고 이제 시어머니가 되었다. 엄마는 무슨 비밀이라도 알려주듯 “나 아직 며느리 전화번호도 모른다.” 했다. 당연히 동생에게 물어보면 금방이라도 알 수 있고 또 얼마든지 그래도 되겠지만 엄마는 동생의 아내가 확실히 아내, 며느리가 되기 전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게 어떤 ‘부담’이 될지도 모른다고. 마치 엄마가 그 사람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그 사람 역시 엄마의 연락처를 알게 되고, 엄마가 자기의 연락처를 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자동적으로 어떤 임무를 갖게 되는 것처럼.


엄마와 나는 다시 떠나기 전 잠깐 우리만의 시간을 보냈다. 전쟁 같던 며칠을 보내고 마치 기념처럼 우리는 <82년생 김지영>을 봤다. 영화 속 김지영이 베란다에 멍하니 서서 지는 노을을 볼 때, 잠깐 잠깐 허공을 보며 멍하니 있을 때, 나는 참을 수 없이 속이 울렁거렸다. 그가 딸로, 며느리로, 아내로, 엄마로 겪어내고 있는 일들은 너무 나와 같고 엄마와 같고 바로 어제까지의 우리였다. 너무 평범해서, 일상적이어서, 특별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 다른 이의 목소리로 말하는, 정신병을 앓는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와는 뭔가 다른 일을, 더 특별하고 더 참을 수 없는 일을 겪은 이여야 하지 않나. 어째서 우리의 바로 어제, 오늘, 지금 그냥 지금 바로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수 있는가 말이다. 그리고 나는 기억해냈다. 다른 목소리들, 김지영들의 목소리를.




“일회용 접시에 담아.”

“너희 엄마 밥 좀 먹여.”

“네가 와서 참 다행이다.”


내가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들은 김지영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오는 그 목소리들이었다. 김지영이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말들, 갖지 못한 목소리들, 다른 이의 목소리를 통해야만 나올 수 있었던 말들을 나는 똑같이 들었다. 그건 모두 여자들의 목소리였다. 말할 수 없었던, 소리낼 수 없었던 김지영은 다른 김지영의 목소리를 통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저 말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수많은 김지영들이 김지영 안에서 단단하게 그를 감싸 안고 있다. 언젠가 우리 모두가 들었던 그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자들만의 대항, 손잡음, 전술. 그건 “나도 그래(Me too).”라고 말하는 목소리, 김지영에게 힘을 주는 수많은 김지영의 ‘목소리들의 연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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