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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현 Aug 28. 2020

뼛 속에서 들려오는 정언 명령

나탈리 골드버그, <뼛 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한문화, 2020


“첫 생각이 가진 에너지.”

내 기억 속 처음 쓴 소설은 중학생 시절 유행하던 ‘인터넷 소설’이었다. 당시 ‘귀여니’를 필두로 인터넷을 기반으로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로맨스 소설이 청소년들을 휩쓸었다. 어릴 적 책 읽기를 좋아하고 독서신문을 정성껏 만들긴 했지만 소설을 써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소설이란 게 무엇인지, 어떻게 쓰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밤새워 읽어내려간 로맨스 소설들을 어렴풋이 흉내내며 무려 공책 3권에 달하는 분량의 소설을 완성해냈다. 당시 삐뚤빼뚤한 글씨로 빼곡히 쓴 소설은 맥시멀리스트인 성격 덕분에 최근까지도 책장 한 켠에 꽂혀 있었고 아-주 가끔 꺼내 읽어보았다. 인터넷 소설의 정석대로 여자 주인공은 예쁜데 찌질하고 남자 주인공은 잘생기고 멋지고 완벽한 일진이었으며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남자는 모두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고 유행하는 소설에는 꼭 등장한다는 기억상실증까지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내용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소설을 쓰던 때의 강렬한 감정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내가 뭘 쓰고 있는지도 모른 채, 어떻게 써야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내가 궁금한 이야기, 내가 읽고 싶은 이야기를 솟아나는대로 마구 뱉어냈다. 그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나 자신이었고 마치 실존 인물들이 내 손을 빌려 대화하듯 신나게 쏟아부었다. 그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초고였고 그 상태로 성공적이었다. 소설로서의 완성도 때문이 아니라 초고의 타겟, ‘나’라는 독자를 완벽히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의 첫 시간은 많은 경우 15분 글쓰기를 진행한다. 흰 백지의 무결함이 압도하는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분명 몰려오는 생각들에 떠밀려 자리에 앉았건만 깨끗한 흰 바탕을 마주하는 순간 단 한 글자도 함부로 찍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첫 문장은 무조건 실패하리라는 생각이 첫 문장을 쓰기도 전에 나를 짓누른다. 15분 글쓰기는 이 두려움, 일단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해준다. 그리고 첫 생각의 가능성을 실현해준다. 떠오르는 강렬한 생각들을 판단하지 않고 일단 쏟아내는 것, 나를 사로잡는 무작위한 생각들을 눈앞에 펼쳐놓는 것, 쓰는 행위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는 것, 이 과정은 결국 첫 번째 독자, ‘나’를 만족시킨다. 내 속에 우글거리는 원초적인 생각들이 무엇인지 또렷이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 생각은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를 만족시키기 전에는 그 누구도 만족시킬 수가 없다. 첫 생각은 나를 아무 재단 없이 펼쳐놓는 과정이며 그 과정을 밟은 뒤에야 비로소 타인을 향한 글쓰기로 나아갈 수 있다. 


나탈리 골드버그의 글쓰기론은 전체적으로 이 “첫 생각이 가진 에너지”를 풀어내는 데 있다. 글을 쓰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날 것의 글, 초고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 그녀는 반복적으로 강하게 “일단 쓰라.”고 말한다. 머릿속에서 판단하지 말고, 주변 환경을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쓰는 행위에 집중해서, 속에서 솟아나는 생각에 몰입해서, ‘뼛 속까지 내려가서’ 끝까지 쓰라고. 그녀에게 초고란 단순히 처음 떠오른 생각을 쓴 글이 아니라 뼛 속까지 내려가서 세상 속에 완전히 녹아든 채로 자신에게 깊이 몰입해서 쏟아내는 글쓰기다. 내 속의 비평가를 깨워 세상의 잣대로 깎아내지 않고 쓰는 과정 자체가 자유가 되는 글쓰기. 많은 사람들이 글의 완성도, 결과물로서 글쓰기를 판단하려고 할 때 그녀는 ‘잘 쓴 글’에 대한 판단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글쓰기란 세상과 일체가 되는 과정, 쓰는 행위 그 자체로 목적인 과정, 내가 나를 직시하는 행위다. 우리는 많은 글쓰기의 순간 어렴풋이 그런 경험을 하지만 대체로 목적지는 ‘잘 쓴 글’에 있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것인가, 어떤 글을 쓸 것인가, 독자들은 어떤 글을 원하는가에 골몰해 쓰는 과정 속에 쓰고 있는 ‘나’는 지워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로 그 생각을 뚫고 들어온다. 그냥 쓰라, 일상 속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쓰라, 사물과 하나가 되어 사물의 목소리로 쓰라, 그저 쓰는 행위에 집중하라, 뼛 속까지 내려가라. 그녀에게 글쓰기는 하나의 수행 과정이다.          



수행과 글쓰기     


카타기리 선사는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쪽에서 당신 책을 출판하겠다고 하면 아주 잘 된 일이지만, 그것에 너무 신경쓰지 마십시오. 당신에게는 그냥 지나가는 일입니다. 계속해서 글을 쓰는 데에만 정진하십시오.” p.279     


나탈리 골드버그는 자주 카타기리 선사의 말을 인용한다. 명상과 불교적 수행에 심취해 있는 그녀의 글쓰기론은 하나의 수행 과정처럼 보인다. 완결된 글, 완성된 책이 행위의 목적, 결과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매달 꾸준히 공책 한 권 분량의 글을 쓰고 있는가, 지금 내가 쓰고 있는가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음, 이야기를 눈앞에 펼쳐놓는 것 자체가 재미이자 목적이었던 어릴 적 글쓰기와 달리 글쓰기를 업으로 선택하면서부터 마감을 위한 글쓰기, 책으로 만들기 위한 원고 작성으로 변질되었다. 세상을 향한 글쓰기는 덕분에 매끄럽고 안정감 있는 형태를 갖추었지만 글 쓰는 행위는 점점 더 괴로움으로 변해갔다. 모든 문장은 틀린 것 같고 내가 쓰는 글이 이 세상에 꼭 나와야 하는 이유를 잃어 갔다.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등진 채 세상을 향해서만 쓰는 글은 금방 토양을 잃었다. 내 이야기는 별천지인 이 세상 속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타고 오르내리며 지쳐갔다. 글 쓰는 게 재미없어졌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언젠가 자신이 쓴 시를 모두에게 보여주었고 아무도 이건 시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 시를 자신이 쓴 것 중 최고의 시로 자신 있게 꼽을 수 있다고 했다. 책을 읽는 동안 글을 왜 쓰는가를 넘어서서 글쓰기 행위 자체에 대해 생각했다. 오랫동안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골몰하는 동안 글을 쓰는 동안의 내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인터넷 소설을 쓰던 당시, 뻔한 레퍼토리에 전혀 독창적일 것 없던 그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열띤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그 사실, 과정 자체가 즐거웠으며 누가 읽어주리라는 기대 같은 건 하지도 않았다. 내가 재밌자고 쓰는 글이었고 철저히 나를 위해서 내가 하는 행위였다. 이후 누군가에게서 내 글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고 그 평가가 다행히도(또는 불행히도) 긍정적이었던 덕분에 나는 타인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가 닿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커질수록 쓰고 있는 나는 쪼그라들고 있다는 걸 오랜 시간 잊고 지내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요즘의 나는 스스로를 반쯤 갉아 먹어 치운 상태였다. 어떤 주제든 요청하는 대로 어느 정도 완성도 있는 글을 써낼 수 있는 지경에 왔지만 전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뻔한 레퍼토리, 다른 소설들에서 오마주해 온 이야기를 쓰던 시절보다도 글쓰기에 흥미가 떨어졌다. 여러 상황들에 의해 매너리즘에 빠진 거라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책은 너무도 적절하게 내게 찾아왔다. 글쓰기는 결코 타인의 평가에 따라 가치매김 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의 목소리로 깨달았다.


계속해서 쓰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명령이다. 행위 그 자체로 옳은 과정인 글쓰기를 계속할 것. 그냥 쓰라. 지금 당장 쓰라. 계속해서 쓰라. 나는 살기 위해서 계속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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