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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상 모두의 언니 Jul 06. 2023

보스턴에서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를 느끼다

동생에게 보내는 열두 번째 편지

열두 번째 편지



나아야 어제는 잘 보냈어? 갑자기 노트북 배터리가 망가졌어. 퇴근 후 돌아오는 남편의 노트북으로 글을 쓰려했는데 자기가 바쁘게 일처리 할 게 있다며 가져가는 바람에 이제야 글을 올려. 기다렸을 텐데 미안!
집 정리가 쉬운 일이 아닌데 깔끔하게 잘했네! 고생 많았겠다. 그래도 나아만의 아늑한 공간을 만들고, 그림책을 쓰겠다는 포부를 당당히 밝히는 모습이 너무 빛난다. 마치 뒤집혀 있던 옷을 다시 반듯하게 개어 놓듯이 새로운 곳에서 나아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확실히 공간이 주는 행복은 있는 것 같아.


 엊그제 화요일(7.4)은 미국의 최대 연휴 중 하나인 "독립기념일"이었어. 곳곳에서 많은 행사, 퍼레이드도 열리고, cook-out 할 수 있는 곳들도 많아. 하이라이트는 단연 밤에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야.


 하지만 이번엔 비가 많이 내려서 행사를 제대로 즐기진 못했어. 집에서 남편과 뒹굴거리다가 그래도 불꽃놀이는 봐야 하지 않겠냐며 주섬주섬 챙겨서 나갔어. 하지만 백팩이나 음료, 삼각대 등이 모두 반입 불가여서 보안 검색대에서 쫓겨나 집에 다시 왔고, 핸드폰과 배터리만 챙겨서 나왔어. 경비가 삼엄하더라고. 어떻게 비벼보려 했더니만.


 불꽃놀이 전에는 Boston Pops라고 오케스트라, 가수들이 와서 다양한 행사를 해. 그 행사가 10시 30분에 끝남과 동시에 찰스강에서 불꽃이 터져. 집에 다녀오니 사람은 전보다 더 많아졌고, Esplanade로 들어가는 다리 뒤로 수많은 인파들이 몰려있었어. 나도 들어가려고 줄을 섰는데,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며 서로 밀치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때 갑자기 "이태원 참사"가 생각나는 거야.


 물론 이곳은 공원이라 압사의 위험은 적었겠지만, 대신 강물로 둘러싸여 공간이 제한적이었어. 시간이 갈수록 그때 트라우마가 돋아서 식은땀이 났고, 혹시라도 발생할 수 있는 사고에 대비해 갈비뼈 앞에 엑스자로 손을 막으며 앞사람과 공간을 확보하려고 했어. 웬만하면 덩치가 작은 여자들 앞에 서있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너무 힘들더라.


이태원 참사가 생각난 밤




2시간의 긴 혈투 끝에 드디어 Esplanade에 입장했고, 남편과 뷰 좋다는 자리에 앉아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었어. 하지만 비가 많이 온 탓에 하늘은 뿌옇게 변해있었고, 불꽃놀이는 절반의 즐거움만 보여줬어.

안개에 가려 얼굴 반만 보여준 2023년 불꽃놀이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아쉬운 것이 남으니 내년 불꽃놀이를 기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잘됐다 싶었어. 아쉽다를 한 겹만 벗겨내도 설렘이라는 것이 등장하니, 세상은 다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어.




 어제는 오랜만에 운동도 하고, 목요일 독서모임 전날이라 하루종일 책을 읽었어. "검은 황무지"라는 범죄소설을 읽었는데, 미국에서도 꽤 인기가 많았다고 해. 확실히 미국을 직접 경험하는 와중에 매우 미국 스러운 소설을 읽으니 느껴지는 정도가 다르더라.


  특히 이 책에서는 흑인 음악이 자주 등장해. 나는 그들이 노예 시절의 "트라우마"를 음악으로 승화한 것이 흑인 음악이라고 늘 생각하거든. 특히 뉴올리언스 여행을 다녀와서는 그 생각이 더 견고해졌어. 이틀연속 그 "트라우마"라는 정의를 삶에서 의도치 않게 마주쳤던 아주 멜랑꼴리 한 시간이었어.


 집에서만 책을 읽기 답답해서 캠브리지에 있는 조그만 브루어리 겸 카페에서 독서를 하다 왔어. 30도에 육박하는 날씨가 무색하게 시원한 곳에서 두개골이 띵할 정도로 차가운 음료를 마시니 이곳이 파라다이스다 싶기도 해. (주말에는 브루어리 투어도 있대서 언젠가 한 번 가볼 생각이야)

Lamplighter Brewing company im Cambridge





 나는 20대 때 관계 중독이었어. 늘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야 했고, 혼자는 뭘 못하는 그런 사람. 세월이 흐르는 동안 수많은 난파선을 띄워보내며 깨지고 상처받았고, 그 결과 지금 나는 혼자의 시간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지. 하지만 그때의 상처들이 트라우마로 조금 남은 것 같아. 남편이 바빠져서 나에게 소홀해지거나 쌀쌀맞아지면 마음이 너무 힘들어져. 마치 버림받진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힌 입양아처럼 말이야.


 나아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모르겠다. 없다면 더 좋을 것 같고. 오늘 하루도 반짝반짝 빛나는 시간이 되길 바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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