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열일곱 번 쨰 편지
나아야! 오늘 오전에 편지를 썼는데, 이사한 첫 주말에 비가 많이 내려 살짝 기분이 다운된 날이야. 주말이라 여유도 있고 해서 옛 노래들을 듣다가 문득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각나서 컴퓨터를 켰어. 길지 않게, 담백하게 글을 써보고 싶어 졌거든
뉴욕도 오늘 비가 오니? 여기 보스턴은 하루종일 비가 꽤 많이 온다. 원래 보스턴의 여름은 비가 잘 안 오는 걸로 유명하다고 하던데, 사람들은 기후가 이상해졌다고 해. 이렇게 습하고 비도 많이 오지 않았다고 말이야. 한국도 물난리로 고생이고, 전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을 앓는 느낌이다.
비 오는 이른 오후 시간, 유튜브를 검색하다 가수들이 나와 자신들의 인생 음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봤어. 산울림, 강산에, 김광석, 김광진, 양희은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의 노래들이 줄줄이 나오더라.
소개된 노래들은 주옥같은 가사들이 많았어.
사랑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달콤하다.
당신이 있음으로 내가 힘든 세월을 버틸 수 있음에 감사하다.
한참을 걷다 옆을 봤을 때 당신이 이미 떠난 후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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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야 나는,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정말 순수한 사람이었던 거 같아.
'솔직함'이 나의 무기라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대하면 모두 다 내 편이 되어주는 줄 알았거든.
언젠가 한 번, 회사의 큰 스캔들에 휘말려 고생하고 있을 때 나를 도와주던 상사 중 한 명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어. 그분은 내가 받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열심히 도와주었지. 그 일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던 때, 내가 그랬어. "나중에 제가 제대로 다시 이야기해 드릴게요". 그런데 그분이 그러더라고. "아니, 나는 궁금하지도 않고, 알고 싶지 않으니 말하지 않아도 돼"
그때 잠시동안 멍-했고, 더 솔직한 마음으로는 창피했어. 굳이 알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분은 어쩌면 회사 일 처리를 위해 일했던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일에 머리 아프게 연관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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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는 연애할 때도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아. 아닌 걸 알면서도 억지로 끼워 맞추고, 외로움을 무기로 연약한 모습을 앞세워 사랑이란 이름의 흉기를 시시각각 들이 밀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인생의 여러 롤러코스터를 타며 결국 중요한 것은 나고, 어떻게 보면 인생이란 별 것이 없다는 것을 느꼈어. 그러면서 이런 집착을 서서히 놓았던 것 같아.
미국에 오기 전, 친구 중 한 명이 연애 고민 상담을 해왔어. 내가 봤을 때 이미 남자는 마음이 끝난 것 같은데, 고향에 갈 일이 있어서 몇 주 동안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단 이야기였어. 내가 보는 그 친구는 너무 반짝반짝 빛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친구는 그런 것들은 다 잊은 채 그 사랑에 몰입해서는 그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았어.
예전의 나였으면 그랬을 것 같아. "당연히 연락해야지! 야 끝장을 봐! 혹시 다른 일이 있어서 연락을 못한 걸 수도 있고, 주저하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때 내 대답은 달랐어. "연락이 없으면 그걸 이별이라고 생각하고 너도 다시 너의 인생을 살아가는 건 어때?" 김광진 가수 노래 중 "편지"에 그런 가사가 있거든. "길고 긴 그대 침묵은 이별로 받아 주겠소". 그 말이 맞아. 침묵도 어떤 때는 거절을 의미하기도 해. 우리는 점점 침묵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러면서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는 거겠지.
글쎄,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 모두 각자 사연이 있고 상처가 있고, 힘듦이 있어. 누군가의 죽음, 가난의 고통 등 인생의 수많은 아픔 중 사랑의 고통은 그나마 달콤하고, 소중하며 빛나는 것임에 틀림이 없어.
나아야, 미치게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아도 시간은 지나가고, 죽도록 힘든 시간도 지나가더라. 진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얼굴이 수면 밖으로 나오는 것 같고, 그 과정에서 내가 성급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아. 침묵이 진정으로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깨닫고, 담백하게 체념할 수 있는 사람.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찰나 같은 순간이 보석임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는지도 모르겠어.
결국 내 아픔도 내 것이고, 내 인생이 안쓰러운 것도 나니까.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는 건 나 밖에 없어-
오늘 봤던 프로그램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노래, "김창완 - 시간"을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할게. 이별은 나의 순간이 사라지는 것뿐이라는 가사에 또 한 번의 감동을 전하며.
마지막 사진은 비가 많이 온 오늘 우리 집 바로 앞의 풍경을 찍어본 거야. 물기를 잔뜩 머금은 식물들이 마치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아. 톡 치면 훅 뱉어 내겠지? 이번 주말도 잘 마무리하고 다음 주도 파이팅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