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에게 보내는 스물여섯 번째 편지
나도 비슷해 나아야. 처음에는 서로의 하루를 공유하고 지금 마음은 어떤지, 어떤 생각으로 지내는지 나누고 싶은 마음에 시작하게 된 교환일기였는데 쓰다 보니 더 잘 쓰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부담감이 생기더라. 초반에 매일 소소한 글쓰기를 할 때는 나아의 글이 매일 저녁 선물이었고, 나도 얼른 답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지기도 했어. 그런데 이제는 어떤 주제를 써야 할까?라는 물음표부터 시작하는 것 같아. 나아 말대로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소소한 글쓰기를 해보도록 할게!
삼 일 전, 남편이 바쁘게 하던 프로젝트가 끝이 났고, 홀가분한 마음을 제대로 즐기자며 급 여행을 떠났어. Cape Cod를 일박이일 여행했는데, 그곳은 나아와 내가 함께 캠핑을 다녀온 곳이기도 하지.
이번에는 Province town이라는 '곶'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에도 다녀와봤어. 영상과 글로만 보다가 실제로 가보니 생각보다 더 크고 관광도시 같은 느낌이 물씬 나더라. 랍스터도 배부르게 먹고, 바닷가와 항구 구경도 했어. 에어비앤비로 숲 속에 있는 조그만 오두막집에서 잤는데, 살짝 오묘한 느낌의 집이었어.
둘이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음악을 들었는데 최근 내가 푹 빠져있는 악동뮤지션(AKMU)의 노래가 나오는 거야. 순수한 느낌의 뮤지션이라 좋아하는데 남편이 갑자기 그러는 거야. 몽골로 갈 당시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거라고(악동뮤지션은 어릴 때 가족들이 몽골로 넘어가 살았다고 해). 당시에는 몽골에서 사는 게 쉽지 만은 않았을 텐데, 그런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순수한 감성의 노래들을 배출해 내는 것 아니겠냐며 웃어넘겼어. 그런데 계속 그 말이 잔상처럼 남아있더라.
최근 독서모임을 하면서 "단테의 신곡"이라는 작품을 읽었어. 단테의 신곡은 중세를 총망라하는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기가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나온 작품이야. 지옥부터 시작해 연옥, 천국까지 순례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과정에서 생각한 것을 풀어나가는 작품이었어. 다 읽고 난 후에 이게 왜 대단한 작품으로 칭송받는지 알 것 같더라. 그런데 그거 알아? 이 작품은 단테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피렌체 도시에서 당파싸움으로 추방당하고 난 후 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필한 작품이라는 것을. 만약 단테가 그 도시에서 계속 잘 나가기만 했다면 과연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참 많아. 누가 봐도 최악의 상황이고 안타깝거나 슬프고 아픈 상황인데, 그걸 다른 무언가로 승화하며 통쾌한 복수를 하거나 그 사람에게서 어떤 광채가 나기 시작하는 그런 일들 말이야.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평생 잘 나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상황이 막막하다고 해도 계속 그럴 거라는 장담을 할 수도 없겠지. 중요한 건 어떤 상황이 주어졌느냐가 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하는 의지와 사색, 행동력에 있을 테니까.
사실 요즘 나는 한국에 가고 싶은 마음이 문득 들 때가 있어. 가족이나 친구들도 보고 싶고, 내 자리가 있는 사무실로 출근해서 일도 하고 싶어. 또 돈도 벌고 싶어. 맛있는 한식요리도 먹고 싶고, 내 정서와 비슷한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지내고 싶기도 해.
일 년 정도 되니까 슬슬 슬럼프가 오는 걸까? 물론 지금 너무 좋아. 사랑하는 남편, 출근해서 일을 해야 하는 압박도 없을뿐더러 보스턴의 거주 환경도 너무 좋으니까. 누군가 내 얘기를 들으면 배부른 소리 한다며 손가락질을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고 공감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미국에서의 내 삶도 나에겐 챌린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해. 이 시기를 그냥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무언가 가치 있는 것으로 승화시켜 돌아갈 때의 내 모습은 달라야 한다는 강박, 아주 가끔은 숨이 막혀.
미국은 경제 대국이니 경제, 재테크 공부를 하며 선진 시스템을 배울 수도 있을 거야. 전 세계의 식재료들을 쉽게 구할 수 있으니 여러 가지 요리를 하면서 요리책을 출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자극적인 썸네일을 써가면서 유튜브로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거야(쉽지는 않겠지만).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쓰며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는 책을 집필할 수도 있을 것이며, 영어를 제대로 공부해서 우아한 고급 영어를 구사할 수도 있겠지. 할 수 있는 건 정말 많고, 푹 빠져서 미친 듯이 몰두한다면 뭔가를 얻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까지는 어느 것 하나 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어. 사실 지금도 그러는 중이야.
그런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라는 의문점이 들어. 나의 정체성은 뭘까, 내가 남들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건 뭘까. 산만하기만 하고 제대로 성장을 하는 것 같지 않은데, 이렇게 계속해도 맞는 걸까?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서 직장에 복귀하고 돈을 벌어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건 어떨까. 수많은 생각들이 뒤죽박죽. (아마 이런 생각엔 십 년 동안 매 달 꼬박 돈이 들어오다 갑자기 뚝 끊기며 남편 월급으로만 살아야 하는 내 신세 한탄도 한몫했을 거야)
또 생각은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완벽하게 갈무리 지어지는 것이 없어. 아 모르겠다.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여행의 여독을 풀며 원 없이 늘어져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