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엔 '라뜰리에 김가'
학창 시절 나는 유난히 비를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비가 내리면 창밖을 쳐다보다 망상에 빠졌다가 혼난 적도 있고, 야자시간에 비가 오면 양말을 벗어 가방에 구겨 넣고 슬리퍼에 맨발 차림으로 떡볶이를 먹으러 간 적도 있다. 또, 비를 보면서 음악을 듣거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참 특이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전과가 있어서 인지, 성인이 되어서도 비가 오는 날이면 내 생각이 절로 난다며 술 한잔하자는 동창생도 있었다.
지금도 그 마음이 크게 변하지 않아서 비가 오는 날이면 기분이 좋다. 촉촉하다 못해 축축해진 공기, 비가 땅을 적시며 나는 흙냄새, 그리고 도시의 소음을 압도하는 빗소리. 마음 같아서는 그냥 빗속으로 뛰어들어 그대로 맞고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면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깨끗해질 것만 같다. 언제 한 번은 이 이야기를 친구에게 했는데, 친구는 '요즘 같은 때 비 맞으면 대머리 된다'고 흉을 봤다.
춘천에서 지내면서 비 오는 날 꼭 가보고 싶었던 카페가 있다. 앞쪽으로는 춘천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뒤쪽으로는 녹음 가득한 산이 있어 마치 숲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드는 곳. 비가 내린다면 더욱 운치 있을 것 같아서 비 오는 날 꼭 가고 싶은 곳으로 오래전부터 점찍어 둔 곳이다.
춘천 시내 동쪽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는 산이 '구봉산(봉우리가 아홉 개인 산)'인데, 이 일대가 몇 년 전부터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경관이 멋진 카페들이 모여있는 핫플레이스가 됐다. 그중에서도 빵 굽는 냄새를 고소하게 풍겨 발길을 절로 이끄는 카페가 있는데 바로 이곳, '라뜰리에 김가(L'ATELIER Kim:ga)'다. 춘천 사람들에게는 '빵 공장'으로 더 많이 불린다.
비 오는 날은 냄새가 멀리까지 퍼져나가니, 이곳은 이미 맛있는 냄새로 가득하다.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빵 한 조각을 주문해 창가에 앉는다. 문득 대학시절 혼자 제주도 여행을 하던 때가 생각난다. 스쿠터 한 대를 빌려 섬을 한 바퀴 도는 여행이었고, 장마기간과 겹쳐 여행 내내 비가 왔다. 우도에 있는 한 카페에서 비를 피하면서 먹었던 커피와 빵. 그날 오전, 카페에는 나 혼자뿐이어서 직원과 이야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기도 했었다. 무모했지만 열정 넘치던 그때가 문득 그립다.
향기나 냄새에 자극받아 과거의 기억을 재생해 내는 현상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르더라.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하던데, 이 작품의 주인공 마르셀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고. 어쨌든, 냄새로 추억할 수 있는 과거가 있다는 건 참 소중한 일이다.
천둥, 번개까지 치면서 창밖으론 자드락비가 퍼붓고 있다. 그 거센 빗줄기 속으로 뿌옇게 보이는 물안개가 이 도시를 집어삼킨 듯하다. 어제부터 비가 거세게 내린 탓에 기온도 높지 않다. 여름 내내 옷장에 보관해 둔 얇은 카디건을 이제는 꺼내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은 회사에서 내년(2019년) 다이어리를 신청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올해도 벌써 반 이상 지났다는 것을 이렇게 깨닫는다. 조금 있으면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새해 다이어리를 얻기 위해 나는 연신 커피를 마시겠지.
결과가 좋든, 안 좋든 올 한 해도 후회하고 싶지는 않다. 그 결과는 내 몫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남 탓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다 보면 '나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얼마 전 읽은 에세이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더라.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도 나에게만 주어졌다.(소노 아야코,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고. "나다운 게 가장 중요하다"고 외치는 작가에게서 후회하지 않는 삶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TRAVEL TIP] 라뜰리에 김가
춘천에서 유명한 빵집으로 대원당과 더불어 춘천 빵지 순례 추천 장소. 요즘 춘천에서 가장 핫하다는 '구봉산 카페거리'에 위치한 카페 겸 빵집이다. 춘천 시내를 조망할 수 있고, 숲 속 새소리를 들으면서 고소한 향의 빵을 즐길 수 있다. 그야말로 오감 만족!
빵의 기본인 '식빵'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디저트까지 대부분 신선하고 맛있어 믿고 먹을 수 있다. 최근에는 강원도 대표 빵 '옥수수범벅빵'을 시그니처 메뉴로 밀고 있다. 아쉬운 점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힘들다는 점과(춘천터미널/남춘천역에서 택시로 8천 원 남짓), 빵 값이 조금 비싸다는 점(식빵류 4-5천 원, 디저트류 7-8천 원, 커피 4천 원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