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내길 1코스. 실레이야기길 @ 김유정 문학촌, 금병산 정상
춘천에는 '봄내길'이라는 예쁜 이름의 걷기 좋은 길, 일곱 곳이 있습니다. 걷기 좋은 계절 '가을', 춘천 곳곳에 소담스레 펼쳐져 있는 봄내길을 직접 돌아보고 있답니다. 춘천의 호수와 철길, 오솔길을 따라서 다양한 길 여행을 떠나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경춘선을 타고 가평과 강촌을 차례로 지나 춘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 아주 특이한 이름의 기차역이 눈에 들어온다. 역 이름이 사람 이름 임에는 분명한데 여자 이름인지 남자 이름인지 헷갈리고, 너무 현대적이라 친구 이름 같기도 한 그 이름. 바로 '김유정역'이다.
이곳은 다름 아닌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의 고향이다.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봄.봄>, <동백꽃>, <금따는 콩밭> 등 그의 소설 12편이 이 주변을 배경으로 창작되었다. '김유정역'은 기존 '신남역'이라는 역 이름이 2004년에 바뀐 것으로, 한국철도 역사상 최초로 역명에 사람 이름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역 이름에 까지 그의 이름을 사용할 만큼, 이 마을을 둘러보다 보면 곳곳에서 소설가 '김유정'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금병산에 둘러싸인 모습이 마치 옴폭한 떡시루 같다해서 이름 붙여진 '실레 마을'. 봄내길 첫 번째 코스인 '실레이야기길'은 이 마을 속 김유정 소설 배경지를 따라 걷는 가벼운 산책길이다.
[TRAVEL TIP] 봄내길 1코스. 실레이야기길
김유정역을 시작으로 김유정 문학촌과 김유정 생가를 지나, 금병산 등산로까지 이어지는 코스. 코스를 둘러보는 내내 김유정 소설 속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마을 곳곳에서 김유정 문학 속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금병산 정상(651m)까지 오를 생각이라면 제대로 된 등산장비를 갖추는 게 좋겠지만, 2-3시간 코스인 실레이야기길만 돌아볼 생각이라면 가벼운 옷차림만으로도 괜찮다. 입장료는 따로 없지만, 김유정문학촌 내 김유정 기념전시관과 김유정 생가를 둘러보려면 2천 원짜리 입장권이 필요하다.
나의 마을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 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 닿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집이라야 대개 쓰러질 듯한 헌 초가요, 그나마도 오십 호밖에 못되는, 말하자면 아주 빈약한 촌락이다. - 수필 <오월의 산골짜기> (<조광> 1936.5)에서
김유정의 고향이자 작품의 배경이 된 실레마을은 곳곳에서 김유정의 숨결이 느껴진다. 실레이야기길의 시작점인 '김유정 문학촌'에는 복원된 김유정 생가와 전시관, 소설 속 풍경을 재현해 둔 조형물 등을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단연 내 눈에 띈 것은 <봄.봄>에 나오는 장면을 재현해 둔 조형물이다. 김유정이 1935년에 발표한 <봄.봄>은 순진한 주인공이 마름의 딸 ‘점순’이와 혼인하기 위해 데릴사위로서 약정된 머슴 노릇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조형물 옆에 적혀 있는 소설 속 대사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소설 속 그때 그 시절로 뛰어든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 작품은 학창 시절에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특히 실감 나는 우리말 표현에서 느껴지는 구수함이 매력적이다.
“글쎄 이 자식아! 내가 크질 말라구 그랬니, 왜 날 보구 떼냐?”
“빙모님은 참새만 한 것이 그럼 어떻게 앨 낳지유?”
(사실 장모님은 점순이보다도 귓배기 하나가 작다)- 「봄.봄」에서
<봄.봄>에 등장하는 장인 봉필 영감은 실레마을에서 욕필이라는 이름으로 통했던 실존인물이다. 김유정은 딸만 여섯을 두고 데릴사위를 부리며 일을 시킨 욕필의 실제 이야기를 가지고 소설을 쓴 것이다. 이처럼 김유정은 이곳 실레마을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고, 그것을 작품에 담아냈다.
김유정 생가에서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면, 건너편에 위치한 김유정 전시기념관에서는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해 더욱 깊이 알 수 있다. 김유정의 생애, 작품집들, 김유정을 다룬 연구 저서와 논문 등 그와 관련한 모든 것을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말을 사랑한 김유정] 코너에서 본 김유정 소설 속 주옥같은 우리말들이 기억에 남는다. 김유정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도 받았지만 그의 소설에는 한문이 거의 없다. 수필, 서간 등의 잡문에서는 한자를 많이 사용했지만, 소설에서만큼은 우리말과 민중의 언어, 토속어와 비속어, 실레마을의 사투리 등을 사용했다. 특히, '뽀뽀'라는 사랑스러운 낱말이 김유정의 소설 속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입이나 좀 맞추고 뽀! 뽀! 뽀!"
- 「산ㅅ골나그내」(1933년)에서
김유정 문학촌을 뒤로하고 금병산 쪽으로 향하면 본격적인 실레이야기길이 시작된다. 푸른 하늘 아래 논밭 사이사이로 난 시골길을 걷다 보면 점차 숲이 가까워진다.
김유정 소설에는 19살 들병이(들병장수)들이 먹고살기 위해 남편과 함께 인제나 홍천에서 이 산길을 통해 마을에 들어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그려졌는데, 그 이름을 딴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을 시작으로 금병산 중턱을 타고 모두 열여섯 개의 길을 걷게 된다. 「두포전」에 등장하는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 길, 「동백꽃」, 「산길」에서 볼 수 있는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등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다. 걷다가 지칠 때쯤 김유정 소설 속 내용이 담긴 푯말들을 찾을 수 있는데 마치 보물찾기 하는 기분이 든다. 덕분에 잠시 숨을 가다듬는다.
실레이야기길에서 살짝 벗어나 금따는 콩밭길과 동백꽃길로 이어지는 길을 오르면 금병산 정상(651m)까지 오를 수 있다. 제법 가파른 코스지만 정상까지 2시간가량이면 오를 수 있다. 수종이 다양하고 흙이 많은 육산이라 걷기에도 매우 편해 사계절 내내 등산객들에게 큰 인기라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실레마을은 산에 포근하게 둘러싸여 있어, 그 이름대로 '떡시루'와 비스름하다. '실레'라는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 본다. 다시 봐도 참 예쁜 이름이다. 금병산 정상을 찍고 내려올 때는 계곡을 따라 난 '만무방 길'을 택했다. 물소리와 어우러진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반갑다. 조금씩 익어가는 가을 나뭇잎들 사이로 들어오는 가을볕이 다사롭다.
마을로 돌아 나오니 출출해진다. 밭일을 하고 있던 아주머니께 먹거리를 추천해달라 했더니 보리밥 집을 추천해주셨다. 저렴한 가격에 제대로 된 한상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TRAVEL TIP] 가마솥 보리밥
신동면사무소 뒷길에 위치한 식당. 저렴한 가격에 푸짐한 밥상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등산객, 관광객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이다. 점심시간엔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 식당의 대표 메뉴인 가마솥 보리밥은 6천 원. 두부전골, 백반 등도 인기 메뉴다. 간이 강하지 않아 심심하게 먹기 좋다. 혼밥 가능. 춘천사랑상품권 가능. 영업시간은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이맘 때면 엄마는 금방 사라져 갈 가을을 걱정하신다. 이토록 아름다운 이 계절이 금방 지나가는 게 아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이 조금만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올해 가을도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간다. 나뭇잎이 짙은 색깔을 입어 가듯, 나는 반팔에서 긴팔로, 긴팔 위엔 어느새 카디건을 걸친다.
올 가을에는 김유정의 삶과 작품을 주제로 하는 '김유정 문학제'가 실레마을에서 펼쳐진다고 한다. 가을을 유난히 좋아하는 엄마와 이곳을 다시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