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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play Dec 11. 2018

춘천의 겨울엔
하얀 눈이 있어 좋습니다.

춘천의 겨울이 좋은 이유 @ 공지천, 의암공원


오늘 춘천에는 눈이 왔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아침 뉴스 앵커가 분명 춘천에는 눈이 조금만 내린다고 했는데,

점심 먹기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그칠지를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오후에는 눈 구경하러 다녀왔어요.


패딩을 입고 장갑을 끼고 발목까지 오는 겨울 신발도 신고, 집을 나섰어요.

아참, 그런데 추울까 봐 꺼내 둔 핫팩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두고 나와 버렸네요.

다시 돌아갈까 고민했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지 뭐예요.



제가 좋아하는 산책로에 눈이 펑펑 내려 온통 흰색으로 물들었어요.

이 산책로의 단풍을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쌓이니 가을 기억마저도 하얘져 버렸네요.


산책로에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차가운 공지천을 유유자적 헤엄치는 오리들이 더 많더라고요.

얼마나 추울까 걱정했는데 평소보다 움직임이 활발한 거 보면 오리도 눈이 내리니 좋은가 봐요.



이런 날에는 좋아하는 시를 생각해 봅니다.

윤동주 시인은 눈을 보고 마음속에 지도를 하나 그렸어요.

시인은 눈이 녹으면, 발자국만 남기고 떠난 순이의 자리마다 꽃이 필 거라고 했어요.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내내 마음에는 눈이 내릴 거래요.


네 쪼고만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


2018년이 보름밖에 남지 않은,

12월의 고요한 오후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잠시 다독여주듯

순이를 향한 시인의 순정이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고민도, 슬픔도, 

그대로 잠시 멈춘 채 마음을 다독여봅니다.


발길을 옮기니

점점 더 큰 눈이 내립니다.


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오후. 큰 눈이 내리는 춘천 공지천 산책로.

 

잠시 산책로에 서서 눈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눈을 흠뻑 맞은 적이 언제였는지. 제법 오랜만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

國境の長いトンネルを拔けると、雪國であった。
夜の底が白くなった。

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길고 어두운 공지천 눈숲을 지나면

눈부신 태양이 나오고, 밑바닥까지 하얀 의암호가 보입니다.



의암호를 따라 언덕에 오릅니다.

몸이 점점 따뜻해집니다.

며칠째 매섭게 불던 북극발 바람도 잠시 쉬어가나 봅니다.

바람도 눈처럼 포근합니다.


제게는,

매년 함박눈이 내릴 때 즈음에 꼭 찾아보는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お元気ですか。私は元気です。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영화 <러브레터>



이 영화를 알게 되고 나서, 저는 일본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전공을 일본어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기까지 했어요.

그만큼 지금도 제 가슴속 깊숙이 남아있는 영화예요.


올해도 겨울 솜이불을 꺼낼 때 즈음에 이미 다시 한번 봤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에는

이 영화가 그저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봤더니

히로코의 마음속 수많은 원망과 그리움을 느끼게 되었어요.

히로코에게는 얼마나 잔인한 겨울이었을까요.


저는 내년 겨울에도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볼 것 같아요.

그대에게도 눈이 오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나요?



잠시 몸을 녹이면서

눈이 온다고 A에게 연락을 했어요.


이 부시다.

세상이 하얗다.

그래서 너무 신나고 근사하다고.


이 광경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행복합니다.

내가 아주 혼자이지 않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도 함께 춘천에 있었다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하얀 겨울날의 오후,

서로가 건네는 따스한 안부는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따뜻한 어묵탕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거기에 시원한 맥주 한 잔을 하면 이보다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춘천의 겨울엔

하얀 눈이 있어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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