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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Apr 28. 2024

결핍, 그리고 연애

나는 왜 남자를 사랑하는 일을 못 놓는가

연애를 시작하고 유지하려면, 연애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의지와 연애를 통해 모든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적당한 단념이 팽팽하게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아무런 결핍을 느끼지 않고, 연애를 통해 채우고 싶은 지점이 없다면 연애 상대를 열심히 탐색할 의지도 누군가의 성실한 연인이 되어 사소한 책임감들을 수행할 의욕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연애를 통해 모든 결핍을 채우려 하면,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환상과 사랑에 빠져 자주 실망하고 결핍을 채워줄 수 없는 연인을 볼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거의 늘 연애 상대를 찾고 있거나 연애 중이었던 나는 그 양극단 중 분명 연애를 통해 결핍을 채우려는 쪽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지 이따금씩 만나서 맛있는 것 먹고 예쁜 데 놀러 가고 전화 통화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하는 정도의 연애로는 근본적인 결핍이 채워지지 않았고 당연히 만족할 수도 없었다.


연인이란 가장 친한 친구도 되어주고, 엄마도 되어주고 아빠도 되어주고 형제자매도 되어주고 미래에는 서로의 버팀목도 되어줄 수 있는 존재여야 했다. 물론 여전히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는 관계가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분리수거나 겨울 패딩 장만하기처럼 혼자 하면 귀찮은 일들도 같이 해주고, 뜯어진 옷이나 인형 꿰매 주기처럼 내가 못하는 것도 해주고, 내가 해준 고른 식당은 다 맛있다며 잘 따라다니고, 내가 해준 음식도 싹싹 비우고 보고 배워서 직접 해주기까지 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평가나 판단에 대한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연애, 그리고 서로에게 쏟는 시간과 노력을 아까워하지 않는 연애를 해야만 채워진다고 느꼈다.


그런 연애가 종료되고 나서 다시 하나씩 홀로서기를 했다. 아무것도 아닌 분리수거도 혼자 하려니까 처음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늘 같이 하던 일이라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혼자 분리수거를 하고 나니 후련했다. 혼자서도 다 할 수 있구나 싶었다. 그 작은 일에 독립심과 성취감마저 들었다. 물론 그전에 혼자서 분리수거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둘이 같이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뿐이었다.


뜯어진 옷은 언젠가 수선소에 가야지 하고 쇼핑백에 넣어두었다가 1년을 넘게 묵힌 끝에 그냥 버려버렸고, 전남자친구가 얼기설기 한 쪽 볼따구니를 꿰메 줬던 애착인형쿠션은 반대쪽 볼따구니도 뜯어져서 테이프로 대충 붙여놨다가 결국은 버리고 새로 샀다. 버리는 것으로도 어쨌든 스스로 문제는 해결했다. 웬만한 식당은 혼자 가서 혼밥 할 수 있게 되었고 배달로도 웬만한 음식은 다 즐길 수 있었다. 요리하는 빈도는 줄었지만, 워낙 맛있게 만들어서 내가 만든 음식은 혼자 먹어도 언제나 맛있었다.


가족처럼 모든 것을 함께하던 연인과 헤어진 후에도 짧은 연애들을 했지만, 그 정도로 일상을 공유하지는 않았다. 집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정도 신뢰가 없었는지 안 알려줬다. 분리수거도 도와달라고 했으면 도와줬겠지만 혼자서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완전히 스스로 해나가는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번의 짧은 연애 끝에도 그렇게 큰 타격은 없었다. 전에는 연인이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연애 중에도 친한 친구는 따로 있었다. 자주 연락하는 친한 친구가 없더라도 혼자서 모든 활동을 스스로 해나가고, 정서적인 욕구마저도 글을 쓰는 것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막역한 지인이 있어야만 외롭지 않을 줄 알았는데, 최근에 알게 됐더라도 동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지인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훨씬 덜 외로웠다.


친구에게 요즘 브런치에 올리는 글의 좋아요가 줄었다고 알고리즘이 바뀌었나 얘기를 하니까 연애 비수기라 그렇다고 한다. 팬클럽(?) 멤버 중에서 골라서 데이트하고, 스토커 얘기 나오고, 외국인 몇 명씩 만나고 하는 얘기가 나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잔잔한 얘기만 하니까 그렇다고 한다.


요즘 마음이 절간이라고 했다. 연애할 때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워서 때맞춰 나온 곽정은 작가의 신간 마음해방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렸는데, 책을 읽다 보니 믿고 읽는 곽정은 언니마저도 남자를 사랑하는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몇 년 새 정은언니도 명상하고 불교 공부하면서 마음이 고요하고 잔잔한 절간이 된 것 같았다. 연애가 주는 행복감을 누리기 위해 그 몇 배나 되는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것에, 나와 상대의 불안정함이 겹쳐 배로 괴로움이 커지는 것에 회의를 느껴 연애를 더 이상 하지 않고 연애할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잠시나마 그랬다. 평소의 나와 달라 이상하기까지 했다. 늘 내가 그토록 채우고 싶었던 결핍을 연애를 통해 채워야지, 더 나아가 결혼이라는 제도로 서로를 묶어 결핍을 흔적 없이 덮어씌워버려야지 했었는데, 드디어 혼자 있는 것이 주는 안온하고 평온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전에는 내가 나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을 잘 몰랐다. 나조차 나를 잘 모르면서 연애로 결핍을 채우려 했으니, 서로가 얼마나 고통받았을까. 글을 쓰며 스스로를 알아가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줄 알게 되면서,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혼자만의 쉴 곳을 만들어내며,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편안한 것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일 년 동안은 내가 지내는 곳을 내 집이라고만 생각하다가 직전에 만났던 연인에게는 내 공간마저 활짝 열어주었다.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마음을 일 년 만에 새로운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그 연애가 결국은 굉장히 큰 상처를 남기고 끝났지만, 이제는 헤어져줘서 고맙다는 마음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만나며 겪어야 하는 고통을 참았을 텐데, 그 고통을 빨리 끊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졌다.


얼마 전에 만난 동생이 언니는 연애 안 하냐고 했는데, 친한 오빠랑 노는 것만으로도 너무 재밌어서 연애할 필요를 못 느끼겠다고 했다. 이성적 감정은 하나도 없지만 몇 가지 공통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고, 몇 가지 여가 생활도 함께 즐기고 그것들에 대해 매일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을 수 있으니 그걸로 삶이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친구관계에 너무 큰 가중치를 부여했는지, 그 관계에 실망이 일자 연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 연애나 시작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가의 명백한 우선순위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내게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꼭 있어야겠다는 갈망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든, 가족이든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나눠줄 수 있는데, 돌아보니 연애를 하지 않으면 내게 그렇게 해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된지가 한참이었다.


지난 일 년간 연하남들을 짧게 만나며 나는 그들의 우선순위였나, 그들은 내게 시간과 에너지, 돈을 아낌없이 쏟았나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럴 것처럼 다가왔다가도 머지않아 바뀌었다. 데이트를 하더라도 만나서도 그들이 해야 하는 공부를 하는데 옆에 있어주는 식이었다.


한 때 친했던 대부분의 친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칼같이 끊어내는 대신 나의 부족함을 그들이 품어주는 만큼 그들의 그릇도 받아들이며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연인보다 친구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에게 쏟았던 내 마음이 너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깨달음이 들면서, 좋은 사람 만나서 연애해야겠다는 생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타인에게 사랑을 주는 일을 내려놓지 못한 나는 주는 만큼 받고 싶다는, 내가 누군가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역시 아직 못 내려놓았다. 어쩌면 아직 결핍의 기억이 주는 고통이 연애가 주는 고통보다 더 크고 생생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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