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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May 20. 2024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가난한 집의 첫째로 태어나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상담선생님이 그려놓은 나의 가계도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해 먼저 묻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떠냐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공부하는 것 좋아하는 선비같은 분이자 젠틀맨이었고, 할머니는 아이 같다고 했다.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냐고 물었다. 아빠가 첫째고 고모 2명, 삼촌 2명 이렇게 동생이 4명 있다고 했다.


아버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떻냐고 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자유로운 영혼’ 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장점 3개 단점 3개를 말하라고 했다. 정 생각이 안 나면 3개 미만으로 말해도 되지만, 각각 최대 3개까지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이 질문도 쉬웠다.


장점 세 가지로는 1)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다 2) 유머러스하다 3) 개방적이다 가 있고 단점 세 가지로는 1) 타인의 입장과 감정에 대해서 잘 모른다 2) 욱한다 3) 딸에게 사랑을 충분히 못줬다 가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 단점은 개인적으로 아빠에 대해 느낀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이 사람에 대해 평가할 때 단점으로 꼽은 것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까지 크게 느끼진 못했는데, 커서 직장 생활하면서 다른 아버지들을 보다 보니깐 다들 딸바보던데,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럴까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물론 어렸을 때도 이따금씩 느꼈다. 친척들끼리 모였을 때 작은 아빠가 사촌여동생을 대하는 것을 봤을 때나, 동네친구네 가족과 함께 가족단위로 놀러 갔을 때 느꼈다. 원래 아빠는 저렇게 다정한 것인가 싶었다. 친구네 아버지가 동네 뒷산을 물려받아서 절을 지어서 구경하러 갔다가 같이 산을 올랐는데, 나의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혼자 먼저 올라갔는데, 친구네 아버지가 가파른 곳에서 내 손을 잡아줬다.


나는 놀라고 감동했다. ‘아, 아빠는 원래 저런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아 친구는 평소에도 저렇게 등산할 때 아빠가 손을 잡아 줬겠구나 싶었다. 중학생 때였다.


선생님은 아버지의 장점과 단점 중에 나와 비슷한 것에 표시를 하라고 했다. 장점 세 가지에 모두 체크를 했다. 나는 원래 책임감이 넘치는 성향인데, 요즘 너무 힘들어서 책임감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유머러스하고, 생각하는 것이 개방적이라고 했다.


단점도 20대까지는 1번과 2번이 모두 해당됐는데, 많이 노력해서 조금 나아졌다고 했다. 3번은 나는 사랑을 잘 줄 수 있어서 해당사항이 없다고 했다. 20대 초까지는 정말 욱해서 겉으로 표출했는데, 지금은 겉으로는 표출을 잘 안 하는데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 속으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고 했다.


선생님이 아버지의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했다. 나도 공감한다. 사람들의 인기를 휩쓰는 좋은 자질을 많이 주셨다. 재밌어서 재밌는 친구들을 늘 사귀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유쾌함을 완전히 잃고 지내지는 않았다. 생각하는 것이 열려 있어서 이런저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눴고, 값진 경험을 많이 하면서 살았다.


아버지와 나는 성격과 성향뿐 아니라, 외모까지 똑 닮았다. 그리고 성인이 된 나는 나와 세상에서 가장 닮은 아버지를 나는 그 누구보다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의 최소한의 책임감에 대해서는 그래도 한 직장에서 직장생활을 오랫동안 쭉 하셨고, 경제적으로 가족들에게 계속 지원했고, 원가족(할머니, 할아버지, 동생들)에게만큼은 책임감이 있다고 했다.


원가족과 아버지의 관계는 어떻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부모님한테 사랑을 많이 받은 것 같냐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젠틀해서 나쁘게는 안 했을 것 같다고 했다. 할머니도 우리 아들, 우리 아들 한다고 했다. 그런데 보통 내가 본 것은 아버지가 부모님을 챙기고, 그들에게 주는 것이라고 했다. 20살 때부터 일하기 시작해서 동생들도 지원해 줬다고 했다.


선생님이 그러면 아버지는 자식으로서 받는 사랑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라고 했다. 아버지의 원가족 구조에서 사실상의 가장은 아버지처럼 보인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일을 쭉 하시긴 하셨지만, 돈을 풍족하게 벌었던 적은 없었고 사실상 아빠가 맏형이자 가장의 역할을 했던 것 같았다.


받아본 적이 없어서 주는 방법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라고 했다. 성인이 돼서 혼자서 생각했을 때도 그랬겠거니 했었다.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다.


연애 상담을 시작하던 첫날, 아버지와의 관계 때문에 연애가 그동안 너무나도 어려웠던 것 같고, 아버지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았다는 마음이 들어서 억울하다고 했다. 선생님이 내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은 안 보인다고 했다. 미워하지는 않으려고 한다고 했다.


내 감정을 딱 짚어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아마도 나는 어릴 때 작은아빠나 친구네 아빠를 보면서 결핍감 이면에 억울함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에게 공주처럼 대접받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했던 역할은 아빠가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으면서도 서른 살이 다 될 때까지도 시키는 일을 묵묵히 했다. 아버지가 점심시간에 내가 다니는 회사 세차장에 와서 세차를 했는데, 닦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서 도와줬다. 주말에 지방에서 일하다가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는데 고구마를 잔뜩 들고 가라길래 너무 싫었는데, 들고 갔다. 안 그래도 마음에 드는 사람이 옆자리에 탔었는데, 고구마를 들고 타기가 너무 싫었다.


평소에 친하지도 않았는데, 본인 생일 즈음 연락해서 선물을 지정해서 사달라고 하길래 속으로는 ‘저 사람 왜 이래. ‘하면서도 원하는 것은 꼬박꼬박 사드렸다.


나와 세상에서 생김새가 가장 닮은 사람을, 한 명의 사람으로서 연민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가 원하는 일을 해주는 일이 그에게 사랑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서적인 사랑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고 느꼈어도, 자식은 부모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나 보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버지 역시 그의 부모에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정서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경제적으로도 풍족하게 지원받지 못했고, 오히려 동생들의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해 줬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살아계시는 할머니가 건강이 안 좋으셨어서 내가 기억하는 한 어릴 때부터 계속 병원에 자주 모시고 다녔다. 나는 아직 해본 적 없는 부모에 대한 보살핌을 부모님이 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직장 생활이 너무 안 맞아서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던 내게 아빠는 퇴직하면 이제 네가 엄마를 부양하라고 했다. 황당했다. 결혼할 때 아무런 지원을 받을 생각이 없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진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직장 생활도 쭉 하셨고, 서울에 집도 있고, 은퇴 후에 하려던 일도 계속 준비해서 자격증도 땄는데 갑자기 엄마를 나보고 부양하라니 어이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내가 꼭 부양해야만 하는 상황도 아니라서, 월세 내고 대출이자 내고 카드값내면 돈 없다고 했다. 결혼 준비도 해야 하고 서울에 집도 장만해야 하는데 어떻게 그 돈을 내가 감당하냐고 했다.


그러면 서울에 안 살고, 지방에 살면 되지 않냐고 했다. 황당했다. 딸에 대한 애정이 아예 없다고 느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확실했구나, 왜 그동안은 확실히 몰랐을까 싶었다. 긴가민가 했었던 과거의 내가  더 미웠다.


1년 반정도 동안은 어디 가서 이런 얘기도 쉽게 못했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어버렸는데 꼭 이 문제 때문은 아니고, 폭력적으로 말하니까 차단해 버렸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욱해서 소리 지르고, 나에게 모욕하는 것을 더 이상 감당하고 싶지가 않아서 차단해 버렸다. 차단은 풀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보고 연락도 안 했다.


상담 선생님이 본인의 인생을 나에게 대입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의 무의식은 그렇게 무섭다고 했다. 시집살이 심하게 당했던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똑같이 하는 것처럼 그런 사례를 많이 보았다고 했다. 자식이 두 명이어도 첫째인 내게 본인이 감당했어야 하는 삶을 그대로 기대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심지어 제사도 장손인 남동생이 아니라 나보고 물려받으라고 했었다고 선생님께 말했다. 아버지가 개방적이시니까 더 딸, 아들 상관없이 첫째가 해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일 거라고 했다.


앞으로도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그건 아버지의 책임이잖아요’라고 말해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혼란스러웠었다. 불효자가 된 것 같았다. 효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적은 없었는데, 내가 보고 자란 아버지는 효자였고 동생들까지 보살피는 큰형이었다. 아버지는 황당하고 놀란 마음에 엄마랑 이혼하면 엄마를 내가 부양하겠다던 내게 지금까지 효녀인 줄 알았는데, 넌 딸도 아니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모욕했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의 연락처에 효녀딸로 저장되어 있었다. 자주 연락도 안 하고, 아빠에게 연락 오면 두 번 정도 안 받다가 한 번 받았던, 간간히 시키는 일들을 하고, 겨우 생일선물만 꼬박꼬박 사드렸던 나는 아버지에게 유일한 기댈 곳이었겠다는 것을 느낀다.


그가 살아오면서 느꼈을 책임감과 부담감, 그리고 억울함에 대해 들여다본다. 부모에게 받은 것도 받을 것도 없는데, 열심히 큰아들 노릇을 했다.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찌 됐든 꾸준히 일하며 경제적으로 부양을 했다. 단순히 부양한 것 이상으로 나는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많은 지원을 받고 자랐다.


송길영 작가의 <<시대예보 : 핵개인의 시대>>라는 책에서 나의 아버지가 처한 현실을 미정산 세대라고 표현한다. 그는 부모를 부양했고, 자식의 교육비를 지원하느라 딱히 노후 대비해서 모아둔 돈도 없지만, 자식에게 더 이상 돌려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세대이다.


나는 아버지가 했던 것보다 딱 3배 정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 같다. 회사를 다니고, 주식 투자를 하고, 글도 쓰고 다른 일들도 같이 준비하고 있다. 술 마시고 놀 시간은 없고, 소모적인 취미생활에 할애할 시간은 아예 없다. 오로지 자기계발하고 글 쓰는데 도움 되는 책 읽거나 건강관리 차원에서 운동한다. 해외여행이나 골프 같은 것은 즐기고 있지도 않고 당장은 즐길 생각도 없다. 아버지가 즐겼던 것들을 나는 하나도 즐길 여유가 없다.


부모님의 아무 도움 없이 기본적인 품위를 유지하며, 내 삶을 꾸려나가는 것도 버겁다고 느낀다. 효자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기 위해 내 인생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상담선생님에게 이 상황이 쪽팔리다고 했다. 친구한테 말하기도 쪽팔리고, 연애할 때도 자신 없어진다고 했다.


진짜 마음을 처음으로 털어놓으니 후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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