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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Jun 02. 2024

우울하지도 않고 불안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마음에 내 자리가 있다는 든든함

필라테스 선생님이 가슴 사이에 한 손, 배에 다른 한 손을 두고 가슴은 움직이지 않고 배에 호흡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게 숨을 쉬어 보라고 했다. 요가를 할 때 요가 선생님은 동작이 힘들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숨을 쉬라고 한다.


얼마 전 심리상담 선생님이 나보고 가끔씩 한숨을 쉰다고 했다. 상담실에서 한숨 쉴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다. 긴장하면 숨을 조금 참는데, 그러다가 몰아서 쉬어서 그렇다고 했다. 상담실도, 선생님도 아직 낯설었고,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도 긴장돼서 그랬다.


일을 하다가도 여러 가지 요청과 데드라인이 한꺼번에 몰려오면 숨이 얕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호흡을 깊고 낮게 깔려고 하루종일 노력했다. 호흡이 가빠지면, ‘아, 지금 호흡이 가빠졌구나. 긴장되고 경직되었구나. ’라고 인지했고, 다시 내가 편안한 페이스로 숨을 천천히 쉬려고 했다.


대학교에서 불교 수업을 들었을 때, 불교철학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이 호흡을 가만히 관찰해 보라는 것이었다. 멈춰 서서 내 숨의 움직임을 의식해 보는 것, 그리고 감정에 변화가 생겨서 숨의 진폭과 속도가 바뀌면 그 감정이 지나가고 다시 호흡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화나는 일이 있거나, 감정이 요동치는 일이 있으면 호흡을 관찰해 보고 폭풍 같은 날 것의 감정이 지나갈 때까지 우선 여섯 번 숨을 쉬려고 했다. 그래도 자주 요동치는 감정과 그에 따라 대응해 이따금씩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는 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요즘에는 대체로 호흡이 낮고 편안하게 깔리는 것을 느낀다. 언제 내가 우울했냐는 듯이 우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언제 지금의 편안함이 사라질까 불안하지도 않다.


무엇이 바뀌었을까 생각했다. 우선 매일 아침 루틴으로 목표와 나의 감정에 대해 짧은 글을 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이렇게 안정되고 편안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말로 정확히 표현해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서 그런 것 같았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나로 인해 어떤 감정과 마음을 느끼고, 내가 어떤 좋은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뚜렷하고 명확하게 반복해서 말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서 더 이상 우울하지가 않아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참 우울하던 몇 년 간, 주변에 나의 의미에 대해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코로나로 일주일에 두세 번 출근하는데, 그때마저도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동료들은 없었다.


너무 좋은 사람을 연인으로 만나고 있었지만 서로에게 완전한 확신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불안했다. 놓아야 할 관계를 꽉 쥐고 있느라 점점 더 스스로와 분리되었다.


자주 연락하는 친구나 가족은 없었다. 당연히 내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들을 기회는 없었다.


임계치에 이르자 가장 약하고 불안했던 약했던 관계부터 하나하나 끊겼다. 사람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지 그때부터 나와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비로소 사람들 틈에서 우울하지 않아 졌다. 겉은 때로 사람들과 함께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본질은 외로운 섬처럼 동떨어져 존재했었는데, 이제는 물론 사람은 모두가 하나의 섬이지만 그래도 제각기의 강도와 속도로 몇몇의 섬과 나의 섬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낀다.


내가 있는 사무실과 어느 날 내가 없을 사무실이 그에게 어떻게 다를지 이야기해 주는 동료가 있고, 내가 주변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고 말해주는 모임에서 만난 지인들이 생겼다.


가만히 혼자 앉아 할 일을 하고 있어도,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올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내가 쓴 글을 읽고 싶고, 나의 경험을 듣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생각해 보면 한편으로는 놀랍도록 낯설고, 또 낯익다.


분명 더 오랜 기간 나는 세상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그 의미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들었었는데, 그 의미를 듣지 못하게 된 때부터 나조차 나의 의미를 잊어버렸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에게 온전히 인정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동안 나조차 내가 없는 세상이 사람들에게 거의 똑같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는 내가 없는 세상이 누군가에게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낀다. 매일 그는 내가 주는 행복감과 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아주 뚜렷하게 이야기해 준다. 내가 없다면 그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내가 주는, 그리고 우리가 쌓아나가는 소소한 행복이 없는 삶은 그에게 한 가지 색이 완전히 사라진 삶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제 나는 분명하게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런 확신이 몇 년 전의 고립감과 우울감을 완전히 씻어주었다. 내가 살아있어서 누군가에게 의미를 줄 수 있는 삶,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크고 작게 존재하는 삶이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깊고 낮게, 그리고 천천히 숨 쉴 수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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