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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기산 Mar 22. 2020

베이컨, 달걀 프라이 그리고 블랙커피

 왜 우리나라에는 미국식 식당이 없을까. 그러니까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이 작당모의를 한다던가, 누군가를 기다릴 때 커피를 마시는 식당, diner라고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메뉴는 베이컨, 달걀프라이, 팬케익이고 블랙커피를 마신다.  


 32번쯤 돌려본 영화 <펄프픽션>을 보면, 빈센트와 줄스가 굉장한 사건들을 수습하고 아침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난 이 씬에서 건달생활을 접겠다는 줄스의 고해성사보다 빈센트가 자르고 있는 팬케익과 베이컨에, 줄스가 마시고 있는 블랙커피에 빠졌다.


<펄프픽션, 1994>


 엔딩 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집 옆, 하나로마트로 득달같이 달려가서 베이컨을 굽고 블랙커피를 내려 마셨다. 세상에 맙소사. 베이컨의 짜고 느끼한 기름 맛과 씁쓸한 블랙커피의 조합은 굉장한 것이었고, 이후 내 아침식사의 정석은 달걀프라이와 팬케익, 베이컨과 블랙커피로 정했다. 이른바 펄프픽션 세트


 물론 회사에서 아메리카노로 때우는 평일 아침은 가능할 리 없고, '주말엔 놀아야지'라는 신념으로 음주 후 맞게 되는 휴일 아침에, 펄프픽션 세트를 먹는다는 건 어지간한 의지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두 번 정도 먹었던 것 같다.


 파스타란 음식은 내가 처한 사회환경적 맥락에 따라 섭취빈도가 극명하게 나뉘는 축에 속했다. 그러니까 국밥을 주축으로 한 소위 '아재 입맛'의 추구자들이 지인의 태반이라(사실 나도 그렇고) 이들과 약속을 잡게 되면 파스타를 먹을 일이 전무하다. 덕분에 연애를 할 때는 무척 많이 먹는 음식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선택하지 않게 되는 카테고리다. 


 물론 파스타는 종종 만들어서 먹는다. 나는 1인분 적정량이 500원짜리 동전 크기라는 것이 굉장한 헛소리라고 믿는 부류인데, 최소 1500원 정도 크기를 삶아서 산더미로 쌓아 놓아야 진정한 파스타라고 생각한다. 이 문제의식은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에서 알렉스가 파스타를 먹는 장면에서 비롯되었다. 소스가 부족해 보일 정도로 면의 양이 많은 웅장한 크기의 미트소스 파스타를 보곤, 그동안 접해 온 어린이 주먹만 한 파스타 똬리는 확실히 문제다 라고 생각했다.


<시계태엽 오렌지, 1971>


 지금은 고민 없이 오일 파스타를 선택하지만, 스무 살에는 크림 파스타의 끝없는 느끼함과 질퍽거리는 식감에 몰두해있었다. 당시 동네 호프집 아르바이트를 하며 받았던 시급으로 크림 파스타를 사 먹기엔 무리가 있어서, 직접 집에서 해 먹기로 결정, 내 인생 첫 파스타를 만들게 된다.


 그렇게 굉장한 음식쓰레기를 한 시간에 걸쳐서 만들어냈는데, 실패 요인은 휘핑크림과 우유를 섞어 면에 비벼놓은 것을 크림 파스타라고 내놓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른바 지옥의 크림 비빔면. 휘핑크림과 우유를 맹신한 나머지 그 외의 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했던 것인데, 한 입 먹고 더 이상의 섭취는 포기했다. 하나남은 진라면을 끓여먹고 이 엄청난 음식을 탄생시킨 자본주의에 감사했었다.


 배를 두들기고 있는데, 그 무렵 퇴근하신 아버지가 내가 만든 크림 비빔면을 발견하셨다. 나는 크림 파스타라고 얼버무렸던 것 같다. 아버지는 맛있다며 다 드셨는데,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정상적인 크림 파스타를 안 드셔 보셨던 건지 아니면 자식이 만든 음식이라 그러셨던 건지 의문이다.


 지금은 먹을만한 파스타를 만들 수 있게 되었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에게 파스타를 만들어 드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요즘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졌는데, 주말에는 오랜만에 파스타를 만들어 드려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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