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기산 Mar 28. 2020

'배려받을 자격' 또한 있다

한겨레 독자 칼럼 기고글

  고시에 합격하거나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나오면 고등학교 정문에는 축하 현수막이 붙습니다.


 이러한 '현수막 축하'가 합격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문제임을 지적하는 글이 2010년 12월 한겨레 신문 독자칼럼 지면에 실렸고<이기적인 펼침막 공세, 2010.12.15, 한겨레, 신승건>, 얼마 후 정당한 개인의 자유라는 취지의 반론이 실렸습니다. <축하받을 자격’도 있다, 2010. 12. 17, 한겨레, 정도현>


 이 글은 당시 반론에 대해 다시 반론의 취지로 한겨레에 기고, 독자 칼럼란에 실렸던 글입니다.  


[반론] '배려받을 자격'또한 있다, 2010. 12. 22 남기산


 지난 18일치 '왜냐면'에서 정도현 씨는 고시 합격생들의 펼침막 축하에 관해, 이로 인해 타인이 느끼는 열등감은 단순히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이므로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펼침막 공세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해버리는 것은 문제 접근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며,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지향점에 대한 고민도 부족해 보인다.


 정도현 씨는 글에서 펼침막이 주는 열등감으로 고통받는 개인에 대해 '그 사람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에 따른 것이지, 고시 합격생 현수막 자체에 의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문제의 관건은 펼침막이라는 축하방법의 '방법론적 문제'에 있다. 펼침막을 통해 축하한다는 행위 자체에 타인에 대한 '과시'의 함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펼침막 축하는 합격자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위한 과시의 목적이 뚜렷하다. 설령 그것이 의도치 않았더라도 그 과시적 축하로 인해 열등감을 느끼는 개인은 펼침막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비단 고시 합격뿐 아니라 고등학교에서도 입시철 막바지에는 소위 일류대에 합격한 학생들의 명단이 대문짝만 한 펼침막으로 붙는다. 일류대로 분류되지 않는 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은 이 공개적인 축하 자리에서 소외된다. 교실을 떠나 성인이 되는 첫 발걸음에서부터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을 체험하는 것이다. 과연 이 아이들이 느낄 열등감 혹은 소외감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일까? 승자에게 '축하받을 자격'이 있고 '펼침막을 설치할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을 자유마저 생기는 것일까?


 그들 못지않은 노력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는 다수의 낙방생들 역시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고민은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더더욱 필요하다. 자유에 대한 기계적인 주장에만 천착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져야 할 정의와 미덕에 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와 <왜 도덕인가?>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 사회가 이러한 고민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음을 방증한다.


 정도현 씨의 주장대로 합격생들은 '축하받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낙방생들 역시 '배려받을 자격'이 있다. 전자의 자격에만 매달려왔던 것이 지난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면 후자의 자격까지 존중할 수 있는 사회, 게임의 승자들이 패자들의 아픔까지 고민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라고 생각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455134.html

매거진의 이전글 베이컨, 달걀 프라이 그리고 블랙커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