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기산 Apr 26. 2020

눈물바다에서 스노클링

우리는 누구나 이방인이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온 교생 선생님은 인기가 많았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니 정이 들기도 했고, 담임과 달리 우리를 혼내지도 않았으며 상냥했기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어쨌든 시간은 지났고 선생님이 떠나는 날이 왔다. 교탁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는데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별다른 동요 없이 눈만 끔뻑거리던 아이들이, 친구가 우는 것을 보고 잠시 고민하더니, 너나없이 따라 울기 시작했던 것도 봤다. 전염된 울음은 나를 제외 한 반 전체에 퍼졌는데, 당시 나는 그게 참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는 선생님이 떠나는 건 아쉽지만 슬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지만 내 옆에서 눈물샘으로 체내 수분을 현격히 감소시키던, 짝꿍 택근이에겐 슬픈 일 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납득가지 않았던 것은, 왜 택근이는 처음부터 울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었다. 이 자식은 분명히 조금 전까지 콧구멍이나 후비고 있었는데, 파도처럼 밀려온 대성통곡 릴레이에 동참한 것이 분명했다. 


 나는 여러모로 이상하고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초등 2학년은 또래 집단에 동조하지 않은 것이 꽤나 부담으로 다가오는 시기이기도 했다. 혼자 울지 않고 있으려니 심적 부담을 느꼈지만, 끝내 억지로 울지는 못했다.


 15년 정도 지난 뒤 읽었던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유명했다. 연로한 모친이 죽었지만, 주인공 뫼르소는 정서적으로 친밀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평소와 같이 애인과 해수욕을 하고 별다를 것 없는 하루를 보낸다.


 모친의 죽음을 슬프게 받아들이는 것은 대부분의 자식들이 느낄 보편적 감정이지만, 누군가에게는 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이란 워낙 다양하고, 일반화할 수 없는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니까. 문제는 슬픔의 여부보다, 사회의 통념에 강요당해 느끼지 않은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고백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정해 진 슬픔의 규칙에서 벗어난 뫼르소는 '이방인'이다. 그는 결국 그 통념에 굴하지 않아 죽음을 맞는다. 

 

 교생 선생님이 떠나던 그날의 나는 이방인이었다. 정든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마음을 나는 허구로 보지 않았다. 다만 전염된 감정에 의해 울기 시작한 택근이를 포함한 반 애들의 눈물은 허구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날의 일기에 반 애들이 흘린 눈물바다에서 스노클링을 하고 있는 그림을 그렸다. 당시 스노클링에 대한 관심이 컸어서, 모든 그림일기에 어떻게든 스노클링 하는 모습을 넣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목격한 허구적 슬픔에 대한 냉소의 표현이기도 했다. 제출한 일기에 담임선생님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코멘트해서 돌려줬다.


 사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었을까. 원래 애들은 친구나, 엄마 아빠가 울면 따라 운다. 문제는 우리가 성인이 되었을 때, 여전히 따라 울어야 할 것을 강요당하는 기분이 들 때다. 어른이 된 이후로, 삶에서 강요당하는 감정의 규칙은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


 하지만 모두가 좋아한다는 것에 나는 심드렁할 수 있고, 그렇다고 이야기할 수 도 있다. 인생이 주는 피로감은 누구나 어떤 영역에서는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면 괜찮아진다. 그리고 그렇게 생긴 빈 공간들에 채워지는 것은 취향이다. 취향은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확히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생긴다.

매거진의 이전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