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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사 Mar 16. 2021

인연이랄지 묘연하달지

어쨌거나 연



딱히 의미없는 사진


 사실 새로운 인연을 만드는   좋아하지 않는다. 새로운 인연에는  많은 인풋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시간, , 감정 무엇이 되었든 그것들을 새로 뽑아낼 열정이 나한텐 없다. 내가 가진 총량을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배하는 것만으로 벅차기도 하고.



 그런데 가끔씩은 아주 우연한 시간과 맞물려 불가피하게 파고드는 인연들이 있다. 지금 나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들이 바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애들이다.(대부분은 '애'로 불릴 시절에 만났기 때문에 애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애들이 자력으로 걸어온 건지, 아니면 블랙홀에 빨려들 듯 내 공간에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다. 나 또한 그 애들의 공간에 내 발로 간 건지 이끌려 간 건지 모르듯이.



 아무튼 이런 인연들이 아닌 대부분의 엷은 인연들은 애써 모른척하는 경우가 많다. 만약 엄마가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중에 좋은 인연이 있을지 어떻게 아냐며 역정을 낼 지도 모른다.(우리 엄마는 '우연한 만남'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편이다. 슬프게도 그 영향으로 나도 환상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내 인생의 모토는 그거다.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고, 될 놈은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도 아주 편하다.




누구냐 넌


 그런데 최근, 내 마음을 아주 불편하게 만드는 인연이 하나 나타났다. 인연이 아니라 묘연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묘연히 나타난 묘연이 아주 묘연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내에 짱박힌 직장인에게는 광합성이 필요하다. 나는 광합성을 위해 의무 반 자의 반으로 매일 점심 산책을 나가고 있다. 과거의 어느 날, 어떤 애는 내가 사방을 보며 걸어서 좋다고 했다. 땅만 보며 걷는 자기와 밸런스가 잘 맞다고. 나는 걸으면서 구경하는 걸 꽤 좋아하는 편이다. 처음 보는 동네의 슈퍼 이름, 지나가는 할머니의 표정, 주차금지 표지판의 빛바랜 정도 등 삶의 흔적이 묻어난 모든 것이 재밌다.


  그런데 이렇게 정신을 딴 데에 놓고 다니는 바람에 가끔은 봐야 할 것들을 못 보기도 하고, 남들은 흘려보내는 것들이 내 시야에 박히기도 한다. 노랑과 하양과 그레이가 적절히 섞인 저 생명체가 후자의 '것들'에 속한다.


 


밥 가지고 왔어?


 그저 지나가는 연(緣)인줄 알았다. 여태까지 그래 왔듯이 그냥 흘려보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다음 날의 점심 산책에 나는 홀린 것처럼 간식을 들고 가고 있었다. 그래도 간식까지는 괜찮았다. 간식은 지나가는 연에게 베푸는 호의로, 잠깐의 불쌍함을 달래는 정도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었으니까.


 사람도 몇 번 보면 얼굴이 익고, 저 사람이 내게 호의적인지 아닌지 본능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물며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길에 사는 기민한 생명체가 그걸 모를 리 없다. 나는 이 애와 얼굴을 트고만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지나가는 행인'에서 '먹을 거 주는 칭구칭구'로 승급한 뒤였다.




밥 잘 챙겨주는 예쁜 인간


 저 애에게 있어 나의 의미도 달라졌겠지만, 나에게 있어 쟤의 의미도 달라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어디서 다치지는 않았을지 생각했다. 5킬로그램짜리 사료를 주문했고, 집에 있는 용기 중 적당한 걸 골라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조금 후회했다. '이렇게 될 까봐 간식만 주려고 했던 건데!'


 밥을 챙겨 준다는 건, 저 애가 가진 삶의 끈을 내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뭐 그리 거창한 표현을 갖다 붙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 정도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만약 밥이 없어지면 저 애는 수 개월, 어쩌면 그보다 빨리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저 애의 동그란 머리를, 포실한 등을, 갸날픈 목소리를 잃을까 무서워서 지퍼백에 사료를 담았다. 이것 봐. 역시 인연을 맺는 건 이렇게나 감정이 쓰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인연을 지속할 예정이다. 비록 저 애의 행방은 꽤 오랜 시간 묘연하지만, 하루 새 꼬박 비워진 밥그릇으로 불안함을 잠재우며, 그렇게 그렇게 이어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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