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조 Nov 15. 2019

끝내주는 야망을 가져야지

열세 번째



야망에 대한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


어릴 적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야망 있는 애였다. 뭘 이루겠다는 건지도 모르면서 희망만 컸다. 십 대 땐 공부만 잘하면 대성한다는 이상한 믿음이 있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주변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준다. 넌 될 놈이다. 재수학원 다닐 적 담임은 나한테 그랬다. 


넌 될 놈이야, 내가 애들 숱하게 봤어도 너 같은 애는 없었다. 


그 해에 나는 수능을 실패한다. 수능이 끝나고 같은 반 아이들과 담임이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소주에 취한 담임은 또 그랬다. 


넌 된다. 내가 장담하는데, 넌 다시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 망령 같은 말에 홀려서 되지도 않는 야망을 못 버린 게 죄라면 죄다. 시간이 숱하게 버려졌다.


뜨뜻미지근한 야망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나이를 먹었다. 그래도 운은 있었는지 그 뒤론 크게 꺾일 일 없이, 남들은 안정되고 좋다는 궤도에 정착했다. 하지만 곧 깨닫는 건 어중간한 야망은 아예 야망이 없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 중 하나는 바로 그 미적지근한 야망이라는 얘길 근래에 누군가와 했다. 차라리 끝장나게 거대한 야망이 있고 그걸 이루기 위해 아득바득 애쓰거나 아니면 야망조차 없어 소박하게 만족하며 사는 것 중 하나라도 해야 하는데, 그 어디에도 들지 못하고 애매모호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잘 되고는 싶으나 그럴만한 열정은 없고, 그렇다고 소소한 것들로 만족하며 살기엔 불만이 너무 많은 그런 인생. 


가끔 진짜로 야망 있는(혹은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내가 가진 건 야망이 아니라 그저 욕심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좋아 보이는 것이 내 것이길 바라는 욕심. 정말로 그것을 가지고 싶진 않지만, 그저 보기에 때깔이 좋아 보이니 뭐든 내 손안에 잡고 봐야 기분이 나아지는 그런 알량한 욕심 말이다. 차라리 욕심이라도 좀 컸으면 야망 흉내나 냈을 것을, 욕심조차 변변찮아서 곧 저건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하고 말아 버린다. 시시하기 짝이 없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올해엔 뭘 이뤘나 돌이켜보다가 올해 가장 잘한 일이 하던 것을 때려치운 일이라는 사실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역시 야망 있는 사람이 되기엔 글렀다. 깨지고 굴러도 악바리처럼 버텼어야 뭐라도 이루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제 뭘 욕심내기엔 지쳤고, 역시 크게 뭘 이루기보단 있는 거나 잘 지키면서 살고 싶다. 


가끔은 재수학원 담임에게 묻고 싶다. 대체 저는 뭐가 되었을까요, 선생님은 제가 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하고. 





매거진의 이전글 당연한 사실: 로또를 사야 당첨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