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올해 10월 CGV에서 RVIP로 승급했다. 궁금해서 통계를 보니 최근 1년간 영화 46편을 CGV에서 봤단다. 영화관에 제일 자주 갔을 땐 한 달에 열 번 간 적도 있다(아마 알라딘이 개봉했을 때가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왠지는 모르겠는데 언젠가부터 영화관엘 자주 가게 됐다. 내 기억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관에 한 달에 한번 정도 가면 많이 갔던 거고 일 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왜 영화관에 자주 가게 되었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계기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그냥 언젠가부턴 개봉하는 대부분의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고 있었다.
조르주 페렉은 소설 <사물들>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인물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들은 영화광이었다. 영화는 첫째로 꼽는 열정이었다. 거의 매일 밤 영화에 빠져들었다. 화면을 사랑했다. 장면이 조금이라도 아름다우면, 조금이라도 마음을 끌어당기고, 매혹적이고, 사로잡는 면이 있으면 그만이었다. 공간과 시간, 움직임을 새로 알아가는 재미에 푹 빠졌다. 뉴욕 거리의 소용동이와 열대 지방의 나른함, 술집의 폭력이 재미있었다.”
나는 시네필이라고까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영화를 좋아하는 축에는 드는 사람이다. 위의 구절처럼 가본 적 없는 장소들과 시간들을 영화에서 배웠다. 가끔은 미술관에 간 것처럼 화면을 감상했고 사람들이 화면 안에서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사람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럴 때면 딴 세상을 사는 것 같은 뻔하면서도 감정적인 순간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또한 공간으로써의 영화관에 대해 말하자면, 솔직히 나는 영화관을 싫어하기 어려운 종류의 인간이다. 나처럼 극단적으로 활동을 기피하는 사람으로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시원하고 따뜻한 실내에서 아늑한 어둠과 함께 영상을 내 눈에 떠먹여 주는 것을 싫어할 리가 없다. 영화는 비교적 시간 때우기 좋은 매체고 책을 읽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다.
물론 나는 넷플릭스와 왓챠의 열렬한 구독자이기도 한데 굳이 영화관을 계속 찾아가게 되는 건 단순히 갓 개봉한 영화 때문이라기보단 영화관 자체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이 맑든 언제나 일정한 어둠, 한 번 영화가 시작되면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는 가차 없는 재생 방식, 소리가 진동으로 느껴질 만큼 강렬한 스피커의 음향 같은 것들은 사적으로 갖추긴 어려운 환경이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를 다시 집에서 볼 때는 그때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단순히 다시 보기의 문제만은 아닌 것도 그런 요소들 때문이겠지.
개인적으로 영화관에서 본 것이 너무 강렬해서 집에서는 틀지 못하는 영화들이 있다. <델마>가 그렇고 <컨택트>가 그렇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정적이 두드러지는 영화들이다. <델마>에서 단 한순간의 완벽한 정적, <컨택트>에서 외계비행체 안의 기묘한 고요함 같은 것들은 요란한 음향효과보다도 더 영화관 밖에서 재현하기가 어렵다. 그러고 보면 나는 조용함을 돈 내고 사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지도 모른다. 정말 완벽하게 조용하고 어두운 커다란 공간을 잠시 사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서 바깥을 완전히 잊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