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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조 Nov 19. 2019

모든 딸들은 어머니의 원죄가 된다

열여섯 번째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보았다. 


고백하자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했다. 고통 회피의 동물적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보면 고통스러울 것이고 속이 터질 것이 뻔했다. 그러나 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어서 결국은 봤다. 울면서 나왔는데 우는 것이 솔직히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나는 김지영, 그리고 보편적인 여성의 고난과 차별에 대해 공감해서 운다기보다는 빌어먹을 자기 연민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그리고 아마 높은 확률로 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도 낳지 않았다(마찬가지로 높은 확률로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장 슬펐던 부분은 육아의 고난과 결혼생활이 망친 커리어보다는 시댁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 보고 싶어’라고 김지영이 중얼거리는 짧은 장면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 보통의 딸들이 인생의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졌을 때면 가장 먼저 할 생각.


어린 김지영은 엄마와 마주 앉아 엄마의 오래된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엄마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는데 지영이 엄마가 되어버렸다는, 흔하고 또 흔하지만 하나의 인생에는 커다란 좌절에 대해서. 지영의 큰언니—장녀가 교대에 간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린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만, 과연 거기에 엄마의 꿈이 투영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나는 엄마의 꿈을 살기 때문이다. 엄마가 되고 싶었던 직업을 내 직업으로 삼았고 진로를 그렇게 정했다. 싫었던 건 아니었다. 전문직, 적당히 벌어먹을 수 있는 직업, 일단 면허를 손에 넣으면 고용 걱정이 적은 몇 안 되는 직종이니 불평은 가당치 않다. 어릴 적부터 엄마는 나를 붙잡고 말했다. 넌 결혼하지 말아라. 그리고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살려면 번듯한 직업이 있어야 해. 그러면 나는 엄마가 하지 않은 뒷말을 상상해보곤 했다. 사실 엄마가 그러고 싶었는데 엄마는 못 했으니 너는 꼭 해내라.


엄마는 아빠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지금 내가 가진 직업을 당신이 가졌을 것이다. 나를 낳지 않고 혼자 살았을 것이다. 나를 낳고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엄마의 이름 대신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엄마가 아니고 엄마가 되고 싶었던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내가 태어난 것이 엄마에게 원죄로 남는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단지 태어났을 뿐이고 사실은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순간이 더 많았는데, 대체 왜 내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그건 내가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 왜 나는 엄마가 ‘너는 혼자 여행도 다니고 하는 게 좋아 보인다’고 부러워하는 것에 뒤돌아서면 왈칵 눈물이 날까. 엄마는 하지 못했는데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왜 이토록 죄책감이 들까.


그 죄책감이 나를 영화 보는 내내 울게 만들었다. 엄마에게 가끔은, 엄마, 내가 행복할 때 엄마는 혹시 불행하지 않아? 하고 묻고 싶었다. 엄마가 그래, 사실 엄마도 너 대신 행복하고 싶었어,라고 대답할까 무서워서 단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는 질문을. 그 질문을 하는 상상을 하며 울었다.


결국 다 하찮은 자기 연민일 뿐이다. 나는 그저 엄마의 불행인 나 자신이 슬펐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 꿈이 엄마의 꿈이 될 수 없듯 나는 영원히 엄마일 수 없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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