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처럼 살 순 없어도 에세이는 쓸 수 있지
아이들을 재우고 보리차를 마시며 글을 쓴다. 오늘의 몇 장면을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첫 번째 장면. 애청자의 탄생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길이었다. 초등학교 방송부에서 아침방송을 시작한다는 멘트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5학년 누구입니다, 6학년 누구입니다. 하는 어린이들 목소리. 공원을 한 바퀴 돌 계획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다. 오늘부터 신청곡과 사연을 소개해주겠다는 말에 함께 마음이 들떴다. 혹시 방금 등교한 딸아이도 교실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을까?
“3학년 ***의 사연입니다.
제가 슬플 때, 기쁠 때마다 듣는 노래예요.
경서의 <밤하늘의 별을> 신청합니다.”
***은 아는 아이였다. 이사 오고 나서 몇 번 함께 밥을 먹기도 한 아이. 하교 후에 혼자 놀이터에 있는 시간이 많은 아이. 수미 이모를 줄여서 수미모라 부르겠다고 했던 아이. 나는 기쁨보다 먼저 튀어나온 슬픔이란 단어가 괜히 마음에 걸렸다. 타인의 슬픔을 짐작해보는 일은 마치 뒷모습에 시선을 주는 일 같다. 이것도 오지랖이라는 것을 알지만 함부로 마음이 갔다. 물론 다음에 ***을 만난다면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하겠지.
다음 사연의 주인공은 피아노 학원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아무래도 거기에 귀신이 사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격자가 한 둘이 아니라는 설명까지. 아무래도 아침마다 어린이들의 사연이 담긴 방송을 듣기 위해 학교 주변을 어슬렁 거릴 것이 분명하다. 애청자 한 명 확보.
두 번째 장면. 스무 명의 눈빛
오늘은 오랜만에 강연장에 섰다. 창원 남산고등학교 학생들이 대상이었다. 미리 담임 선생님에게 받은 질문지를 보면서 내용을 구성하면서 고등학생 시절을 자주 회상했다. <애매한 재능>에도 나오는 학창 시절. 백일장 나가기 위해 선생님과 싸운 이야기, 마산 종점 가포에서 사파동까지 영화를 배우기 위해 버스 타고 다녔던 이야기, 단칸방에는 친구와 비밀을 말할 곳이 없어 옥상에 올라가 전화를 받았던 이야기... 그때를 회상하니까 학생들에게 더 좋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벚꽃이 보이는 대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눈을 맞추며 보낸 시간. 여느 강연 때와 다르게 나는 준비한 원고와는 다르게 마음속 이야기를 했다. 하고 싶은 것도 좋아하는 것도 찾는 게 너무 어렵지 않냐는 말, 자신이 가진 재능이 너무 작아 보이더라도 미워하지 말라는 말. 오늘따라 준비하지 못한 멘트가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PPT 넘기는 것도 까먹기도 했는데 너그러운 관객들은 기다려주었고, 자주 웃어주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표정을 전부 보긴 힘들었지만 오히려 눈빛은 더 진하게 느껴졌던 시간.
세 번째 장면. 하원 풍경
강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아이들의 학교로 달려갔다. 유치원 신발장에는 두 아이의 신발만 남겨져 있었다. 쌍둥이 형제의 것이었다. 인터폰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호출하니 “엄마!”하고 뛰어나온다. 예전 같았으면 왜 늦게 왔냐고 투정 부리고 속상해했을 텐데 전날 밤에 잘 일러둬서일까. 매일 빨리 데리러 오라는 딸도 “괜찮으니까 천천히 와.” 소리를 했다. 일하는 엄마로 사는 건 꼭 투쟁 같았는데, 끝없는 설득같이 느껴졌는데. 벌써 이만큼 컸나 싶다. 함께 돌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하는 길. 아이들의 뒷모습을 남겨두어야겠다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