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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미 Nov 01. 2021

날카로운 체리박의 추억

창원에 살고 방송국 다녀요.

 가요를 즐겨 듣는다. 팝송을 잘 모른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sing, sing, sing(With a Swing)' 이란 노래다. 김연아 씨가 나왔던 모 에어컨 CF에도 나와서 우리에게 친숙한 음악이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8rMnb-BezBk&t=37s

'루이스 프리마'의 <sing, sing, sing>은 다양한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다. 이건 1960년대 가수인 폴 앵카 버전.    



 색소폰 소리가 멋들어지게 어우러진 
, , ' 듣다 보면 
 어느새 나는 2007,
시골 마을의 논두렁으로 달려간다.


 2007년, 시골 논두렁에서 나는 방송 구성안을 들고 서 있었다. 방송국에 들어가 일을 맡은 첫 프로그램인 <얍 활력천국>이라는 TV 프로그램 촬영을 하기 위해서다. <얍 활력천국>은 경남에서 지역방송 좀 봤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레전드 방송’으로 떠도는 55분짜리 예능 교양 프로그램이었다.


 100% 야외 올로케이션을 자랑했던 <얍 활력천국>의 무대는 벼를 벤 휑한 논두렁 또는 마을 회관 앞이었다. 누구네 소가 송아지 낳았다더라, 장평댁 손자가 받아쓰기 100점 받았다고 하는 소식이 '주요 마을 뉴스'로 소개되고 더불어 어르신들을 위한 파마와 이발 서비스, 질펀한 만담과 노래자랑이 뒤섞인 이른바 마을 잔치였다. 실제로 마을 이장님들께 섭외 전화를 돌릴 때도 핵심처럼 이 말을 했다. '하루 즐겁게 노는 마을 잔치'같은 방송이라고.


 자고로 잔치에는 술이 빠질 수 없는 법. 어르신들은 노는 데 술과 음식이 빠지면 섭섭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출연료 명목으로 드리는 소정의 마을발전기금으로 마을 부녀회가 음식을 준비했다.  어떤 날은 따끈한 파전, 어떤 날은 방금 무친 겉절이가 안주로 나왔다. 우리는 그걸 에피타이저, 경상도 사투리로 '을요구'라 불렀다.


마을에 도착해서 작은 세트를 세우고 있으면, 멀리서 차량을 운전했던 기사님이 손을 흔드셨다.


 "수미야, 와서 한 잔 마시고 해라."


 나는 그 말을 거절한 적이 없었다. 현장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던 나는 쪼르르 달려가 술 한잔 받기가 아무래도 눈치가 좀 보였다. 다른 스텝들은 뭘 하나 고개를 돌려 확인한 다음 재빨리 뛰어가서 잔을 받았다. 몰래 먹는 술은 얼마나 달던지. 사발에 담긴 뽀얀 막걸리를 쭈욱 마시면 없던 힘도 솟아났다. 새벽같이 차를 타고 달려온 피로도 싸악 사라졌다.  


 푸른 천막으로 햇빛을 막고, 두꺼운 방수포- 일명 '갑바'를 깔아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를 막으면 관객석이 완성됐다. '을요구'로 어느 정도 속을 채운 어르신들이 하나둘 자리에 앉으면 드디어 쇼가 시작됐다. 자신들의 사소한 이야기가 뉴스가 되고, 마을 주민이 나와서 만담을 펼치는 걸 보면서 어르신들은 크게 웃었다. 어르신들의 호응이 좋을수록 진행자는 신이 나서 목소리가 커졌다. 잔치의 하이라이트는 초대가수였다. 티브이로만 보던, 라디오에서만 듣기만 했던 가수를 눈앞에서, 그것도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볼 수 있다는 기쁨! 누가 초대가수로 오느냐를 어르신들은 가장 궁금해했다.

 

 <전화 통신>을 부른 백남송 선생님부터 '니가 뭔데'라는 곡으로 어르신들에게 열정적인 삿대질 안무를 선보인 젊은 가수, 보라 님까지. 다양한 가수들이 논두렁 무대를 찾았다. 덕분에 나는  '현철', '조항조' 같은 유명 가수부터 이름도 생소한 신인 가수까지 수많은 트로트 가수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은 '체리박' 씨가 오기로 되어 있었다. '체리박'. 처음 들어보는 신선한 이름이었다. '체리박' 씨를 섭외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원래는 다른 가수가 섭외되어있었는데, 펑크가 나면서 급조된 분이었다. 보통은 자신의 대표곡 한 곡과 신나는 트로트 메들리를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체리박' 씨의 선곡은 남달랐다. 스윙 재즈였다. 논두렁에 울려 퍼질 재즈를 가만 상상했다.


"멀리 00에서 온 초대가수를 모셨습니다. 자두도 복숭아도 아닌 체리! '체리 박'이 부릅니다. 씽- 씽- 씽"

 

 진행자의 근사한 소개와 함께 중절모를 쓴 '체리박' 씨가 걸어 나왔다. 즐겨 듣진 않아도 익숙한 노래였다. 영화 <노다메 칸타빌레>에서도 나왔던 노래. 어깨를 들썩이게 만드는 색소폰 간주가 묘한 흥분을 일으켰다. 하지만 '체리박'씨는 바로 시작하지 못했다. 들어갈 타이밍을 놓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기계를 나무라듯 '다시'를 외쳤고, 당황한 건 제작진이었다.


 베타랑 진행자는 이를 자연스럽게 넘기며 다시 '체리박'을 외쳤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노래가 시작하는 타이밍을 맞췄다. 노래는 시작되었지만 목소리에 자신이 없었다. 제작진들은 서로의 눈치를 봤다. 가수 섭외 담당인 스텝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웃고 있는 건 용 피디밖에 없었다. 이것 또한 '그림'이 될 거라는 확신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쩐지 '체리 박'을 정면으로 보기가 불편해서 나는 자리에 앉아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는데 그때 내 귀에 선명한 한글 가사가 들려왔다.


"씽씽씽씽~ 나비가 훠얼훨 씽씽"


분명 팝송 이랬는데.

 '나비가 훠얼훨'을 시작으로 마치 즉흥에서 만들어낸 듯한 알 수 없는 한글 가사가 이어졌다. 절망한 표정의 가수 섭외 담당 스탭.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뜬 듯한 카메라 감독. 그리고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만 나.

'체리 박'씨는 싸늘한 장내 반응에 굴하지 않고 1절을 마친 후. 스스로 노래가 끝났음을 선언했다.


"끝!"


 그리고 쿨하게 손을 흔들었다. 보통은 초대가수의 노래가 끝나면 '앵콜'이 쏟아지기 일수인데 아무도 '체리박'을 잡지 않았다. 이름을 부르지도, 앵콜을 외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논두렁을 지나간 노래바람. '씽, 씽, 씽'.  황당한 '체리박'씨의 마무리에 진행자는 수습하느라 바빴다.

 

 메인 피디인 용 피디만 만족한 듯했다.


"괜찮다. 아주 재밌는 그림이다."


 인생은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계획한 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방송도 그랬다. 한 달도 전에 섭외한 가수가 갑자기 펑크를 내서 급하게 대타 가수를 섭외할 때도 있고, 어제만 해도 연락이 잘 되던 가수가 당일에 장염으로 탈이 나서 늦을 수도 있다. 능숙한 방송쟁이일수록 방송에서 생길 수 있는 변수에 대해 유연하게 반응했다. 나는 용 피디의 실망은커녕, 반짝거리는 눈을 보고 괜찮은 일이라고 안심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인 건, 우리에게는 두 번째 카드. 또 다른 초대가수가 있다는 것이다.

  

 방송에는 '체리 박'의 활약이 그대로 나갔다. 다른 초대가수라면 10분의 방송 분량은 채울 텐데 '체리 박'씨는 짧고 굵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사라졌다. 우리는 한글 자막으로 '나비가 훨훨'이라고 썼다. 자막 작업을 하던 피디와 나는 덕분에 또 한 번 웃을 수 있었다.

 

 글을 쓰면서 '체리 박' 씨의 근황이 궁금해 검색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유튜브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체리 박' 씨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다시 '씽, 씽, 씽'을 들었다. 가만 듣고 보니 'Now, if you like it we will stay Sing, sing'이라는 가사가 '나비가 훨훨 씽-씽-'으로 들리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어쩌면 내가 '체리박' 씨를 오랜 시간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HVhBJVnRFcY

<얍 활력천국>이 궁금하다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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