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에 살고 방송국 다녀요
그날의 노래방은 이를테면 이별과 새로운 만남의 승강장이었다. 방송작가 한 명과 스크립터 두 명이 일을 그만두는 날이자, 신입 스크립터의 환영식이 있는 날이었다. 마산 MBC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들은 얼추 모인 듯했다.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는 노래방에서 ‘누가 먼저 노래를 부를까’ 눈치를 보는 어색한 분위기. 그때, 나이로 치면 모인 사람 중 맏언니 격인 봉 언니가 나를 지목했다. 하필이면 오늘 회식이 처음인 나를.
스물세 살, 서울 생활에 완전히 지쳐 부모님이 살고 있는 마산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취업을 했다. 마산(2008년 당시만 해도 마산, 창원, 진해가 창원시로 통합 전이었다.)의 유일한 방송국.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마산 MBC'였다. 2년제 전문대학 갓 졸업하고 서울 대학로에서 아동극도 깔딱, 기업 홍보영상도 깔딱 몇 개월이 작가로서의 경력 전부였던 나는 바로 구성작가가 될 수 없었다. 자료 조사와 섭외, 현장 진행을 도맡는 스크립터를 하며 방송의 감을 익히는 게 먼저라는 PD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환영식에도 참석했던 것인데, 분위기가 어째 예사롭지 않았다.
나를 첫 노래 타자로 지목한 봉 언니는 같은 방송국,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그는 비스듬히 소파에 팔을 기대며 말했다.
“야. 서울예대 얼마나 잘 노나 보자.”
그것은 분명한 견제였다. 작가실도 아닌 노래방에서 나는 나의 실력을 증명해야 했다. 글도, 구성력도 아닌 가무로. 이제 막 들어온 신입 스크립터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순발력을 발휘해 노래방 기계에 번호를 찍었다. 누구나 애창곡은 있는 법이니까. 노래방 화면에 제목이 떴다. 대충 불러도 신나는 노래. 자우림의 ‘매직 카펫 라이드’였다.
‘이렇게 멋진~ 파란 하늘 아래!’라는 고음의 가사를 쭉 뽑아냈다. 나는 썩 잘 노는 편도 아니지만, 듣는 사람이 귀를 틀어막고 싶은 만큼의 음치도 아니었다. 부르는 내내 곁눈질로 반응을 살폈다. 나쁘지 않았다. 나를 지목한 봉 언니만이 은은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1절이 끝나자, 정지 버튼을 눌렀다.
“서울예대 별 거 아니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자, 경남대 가자!”
서울 vs 지역. 투명한 선 가르기. 서울예대 출신이라는 게 억울해지는 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아주 서울 사람은 아니었다. 학교 때문에 3년 살다 온 게 다인데. 이렇게 분명하게 편을 나눠서 경쟁을 시키는 이유란 무엇이란 말인가. 분위기가 불편했던 이유가 선명해졌다. 하지만 봉 언니의 지목을 받은 희연 언니는 비장했다. 리포터인 희연 언니의 끼야 안 봐도 뻔했다. 잘 놀게 분명했다. 하지만 언니는 좀 더 확실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준비를 좀 해야지.’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노래방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다른 방에서 탬버린이라도 더 공수해오려는 걸까? 나만 어리둥절할 뿐, 노래방 소파에 앉은 사람들은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3분 후, 희연 언니는 두루마리 휴지를 귀에다 꼽고 손에다 길게 두르고 나타났다. 마치 봉산탈출에 나오는 취발이처럼.
언니가 선곡한 곡은 이정현의 ‘와’. 심장 뛰는 간주에 과격한 테크노 춤을 추기 시작했다. 화려하다 못해 현란했다. 춤사위가 예사가 아니었다. 허리를 비틀고 엉덩이를 흔들고 난리도 아니었다. 나는 입을 벌리고 진풍경을 감상하는 수동적인 자세밖에 취할 수 없었다. 다들 박수를 치고 환호를 하는데 묘한 패배감이 들었다. 다들 경남대가 서울예대를 발랐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두 사람을 지목했던 봉 언니는 껄껄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노래 잘 들었다. 잘 지내보자.”
그렇게 스물세 살, 나는 마산 MBC에서 일하게 됐다. 연예인보다 촌 할매할배를 더 많이 섭외했고, 주 6일도 모자라 일주일 내내 일하는 게 당연했던 빡센 세계. 일주일을 고군분투하여 50분짜리 방송을 송출한 날에는 커다란 브라운관이 있는 술집에서 서로의 수고를 취하하며 소주잔을 들던 시간. 멋진 걸 만들어냈다는 기쁨과 보람도 잠시. 프로그램 시청자 게시판에는 ‘제발 서울 방송 틀어주세요. 라디오 스타 보고 싶어요.’라는 글이 올라왔던. 시청률에 일희일비하며 웃고 울며 치열하게 만들지만 '지역'이라는 이유로 '그들만의 리그'라는 이야기를 듣는 세계. 어떻게 하면 촌티 안 나게 만들지가 고민인 지역 방송 쟁이들의 이야기. 우리만 알기에 너무 아까웠던 순도 높은 그 시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