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는 문지문학상 후보작을 묶어 계절마다 펴내는 단행본 시리즈로, 이번에도 역시 세 편의 단편소설이 담겨있다. 강화길 작가의 <화원>, 서이제 작가의 <0%를 향하여>, 임솔아 작가의 <희고 둥근 부분>, 그리고 작가 세 명과의 인터뷰. 이번에 담긴 세 편의 소설은 모두 매력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바로 직전 단행본인 <소설보다 봄 2020>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0%를 향하여>. 국어사전에서 '향하다'를 검색하면 여러 뜻이 나온다. 어느 한쪽을 정면에 둔다거나 목표로 한다거나 마음을 기울이는. 대개는 지향하는 바를 담은 긍정적인 목적어와 함께 쓰이게 된다. 하지만 이 소설의 제목은 그것과는 달랐다. 0%를 향해 가는 독립영화의 관객 점유율, 영화를 전공한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이 점점 더 좁아지는 독립영화의 땅에서 경험하는 절망. 반대로 말하면 0%대의 극소수만 누릴 수 있는 성공을 향한 아주 약간의 희망.
이 소설을 읽으며 '도전'이라는 단어 뒤에 숨겨진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할까 말까 고민될 때에는 하라는 말.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정말 가파르고 험하다면, 나보다 앞서 그 길을 걸은 자들도 모두 고개를 가로젓는다면, 그래도 이 일을 해야 할까? TV나 인터넷, SNS에 쏟아지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성공스토리를 보면 언제나 도전은 아름다운 것이며, 도전하지 않는 자는 열정이 없고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세상은 너희들은 젊은데 실패 좀 하면 어떠냐며 다시 극복하고 일어설 시간이 있지 않냐고, 등을 떠민다.
아니, 젊은이들에게도 도전은 무섭다. 대부분의 도전은 마치 도박판처럼 판돈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수년의 시간을 쏟아부어 힘들게 들어간 회사일 수도, 여름날 한낮에도 지하철 두세 정거장 거리를 걸어 다니며 모은 얼마의 돈일 수도 있다. 부양가족이 없다고, 신체가 건강하다고, 잃을 것이 별로 없다고 낭떠러지 앞으로 누군가를 밀어낼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나는 책방을 차리고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책장 한 칸을 따로 채울 정도로 서점을 운영하는 분들이 직접 쓰거나 그들을 인터뷰한 책들을 사서 읽었다. 책방에서 운영하는 책방 창업 워크숍에 참여한 적도 있다. 이 과정에서 드는 생각은 쉽지 않겠다 싶은 수준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인터뷰집의 제목이 <책 팔아서 먹고살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이라거나, <솔직히 책이 정말 팔릴 거라 생각했나>일까. 대형서점에 비해 턱 없이 높은 공급률과 재고를 떠안아야 하는 구조. 올라만가는 임대료를 피해 유동인구가 적고 땅값이 저렴한 곳으로 옮겨 다니며, 동네가 유명해지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역설. 규모의 경제를 이룬 인터넷서점과의 경쟁은 힘들고, 사람들은 네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까지 벌려고 하는 것은 욕심 아니냐고 한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도 안정적인 월급이 나오는 직장인의 생활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도 그렇다. 좋아하는 일을 하려다가 후회하게 된다면, 높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내가 좋아하던 것들을 오히려 싫어하고 원망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전을 하기 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도전을 늦추고 현실의 벽을 낮추는 것. 작더라도 내 건물에서 주거와 사업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임대료가 없으니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내 업무 분야에서 전문성과 이력을 갖춰서 프리랜서나 단기 근무로 소득을 거둘 수 있다면 가게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될까? 맛있는 커피와 독창적인 굿즈, 편안한 인테리어를 직접 만든다면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 될까? 이런 생각에 열심히 돈을 벌고 덜 쓰려한다. 힘들더라도 경력에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를 맡아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집에서는 커피를 내리며 디자인 툴을 공부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예쁜 공간들을 찾는다.
내 소유의 건물에 책방을 차리겠다는 말이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아니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하고 싶은 일을 이미 접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내 나름의 도전 방식이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겁이 많아서,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일 뿐이다.
로그라인. 영화의 주제와 줄거리는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내가 말로 할 수 있었다면 말로 했지, 구태여 영화로 말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한마디로 될 일이었으면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되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늘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한마디로 요약되기를 거부하는 말이었고,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는 어째서 이야기를 그렇게 써야 하냐고 반문하는 이야기였으니까. 나는 거부할 수도 반문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학생에게 전통적인 플롯에 대해, 극적 개연성에 대해, 명확한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파토스와 카타르시스. 주인공을 불행하게 만들고, 주인공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으라고 했다. 죽고 싶게 만들고, 죽을 수 없게 하라고 했다. 뭐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인공은 옆집 애를 구하러 갈 때도 이유가 있어야 했다. 이유가 없으면 옆집 애를 구할 수 없었다. 주인공에게는 애를 잃은 경험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또 다른 애가 죽어야 했다. 이야기 속에서 사람을 죽일 때는 생각을 하고 죽여. 나는 그런 말을 했고, 그런 말을 했지만, 그런 말을 하고도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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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마다 학생은 자기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글을 못 쓰겠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을 쓸 수도 있지만,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갈 수도 있는 거야. 영화도 마찬가지로,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네가 하고 싶은 말을 찾아갈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그냥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라고 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나 자신이 싫었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갔다.
(p. 76)
나는 내가 영화감독인지, 과외 선생인지, 아르바이트생인지, 그냥 백수인지 뭔지 모르겠어. 지혜는 만나기만 하면 그런 말을 했다. 너는 프리랜서지. 지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냥 자신을 백수라고 생각하는 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너는 직업이 많네. 영화감독이고, 과외 선생이고, 아르바이트생이고, 백수는 직업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는 뭘 많이 하고 있는 거야. 우리 맨날 바쁘잖아. 돈도 안 되는 일 하느라 매일 바쁜 게 우리 삶이었다. 그런데 요즘 내가 과외하다가 느낀 건데, 요즘 애들은 다 영화 찍어봤다? 우리 학교 입학할 대는 영화 찍어본 애들 거의 없었잖아. 근데 신기한 건, 요즘 애들은 영화를 안 봐.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이제 우리도 꼰대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p. 82)
맞아. 독립영화인들도 독립영화는 안 된다고 하잖아. 미래가 없다고 하잖아. 미래를 본 적도 없으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미래를 본 적이 없어서, 미래가 없다고 했다. 망했어. 성공한 적도 없으면서 망했다고 했다.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독립영화에 대해 물으면, 대개는 혼자 말하다가 혼자 화를 냈다. 시팔, 죽어도 독립은 하지 마. 도망쳐. 어차피 독립영화는 안 돼. 독립영화는 안 돼. 독립영화는 안 돼. 그런 식으로 되고 있었다. 어차피 독립영화는 안 된다니까. 그렇게 되었고, 그렇게 되고 있었다. 한국 영화 100주년에 서울독립영화제는 44주년이 되었고, 한국독립영화협회는 창립 21주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