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랜맨 Oct 25. 2019

우리 아빠 아닌데요

무임금 노동착취의 현장

토요일 아침 7시 반. 평소 같으면 단잠에 빠져있을 시간이지만,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뒤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아침 9시에 병원 진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8시간 이상 공복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아침 시간으로 미리 잡아놓은 것이긴 했지만, 일찌감치 할 일을 끝내고 주말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는 점 또한 이른 기상을 그리 힘들지 않게 해 주었다. 창 밖에는 가을비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수준의 장대비가 쏴아-하고 내리고 있었다. 평일 내내 맑더니 하필 주말에 비가 온다는 사실에 실망한 것도 잠시, 비 오는 날은 그 나름의 운치가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토요일이기만 하다면 비가 아니라 벼락이 떨어져도 행복할 테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늦을 뻔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반. 버스정류장까지 빠른 걸음으로 총총 걸어가, 운 좋게도 버스를 바로 잡아타야 아슬아슬 세이프할 정도의 시간이었다. 쏟아지는 비를 감안해서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택시회사에 대한 불만이 많으셨던 기사님을 만나 사납금 제도의 불합리함에 대해 일장 연설을 들으면서 이동한 터라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예약시간 10분 전에 도착했다. "뭐 주절주절 말하면서도 할 일은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던 기사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 병원 진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피검사와 초음파 검사 등을 마치고 나오니 이제 겨우 9시 40분. 예상보다 너무 일찍 진료가 끝나버린 탓에, 오히려 문 연 식당이 없을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그때였다. 휴대폰에 울리는 진동. 내가 일하는 팀이 속한 임원의 부고 문자메시지였다. 내일 오전에 잠깐 장례식장에 들러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순간, 또다시 울리는 진동. 이번에는 우리 팀의 단체 채팅방이었다. 지금 진행 중인 임원회의가 끝나고 임원들의 단체 조문이 있을 예정이고, 우리 팀이 안내 및 데스크를 맡을 것이니 남직원들은 장례식장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왜 상사의 부고에 직원들이 여기저기 서서 안내를 하고, 데스크에서 조의금을 받아야 하는가. 임원들이 대거 오는 것과 내가 가서 일해야 하는 이유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 왜 남직원만 일하는가. 여러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라는 씩씩한 대답 대신 침묵으로나마 불만을 표하는 것뿐이었다. ('넵'을 쓰기에도 짜증 났다.)


해방촌에 있는 독립출판사에 가서 책을 몇 권 사볼 생각이었다.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창 밖으로 비 내리는 걸 보며 글도 쓰려고 텀블러와 함께 노트북도 챙겼었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길, 가방이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장으로 갈아입고 검은색 넥타이를 안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장례식장까지는 1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지하철역에서 병원은 그리 멀지 않았지만, 장례식장은 병원의 가장 구석진 곳에 있었다. 위로는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고 아래로는 갓 떨어진 은행들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뎌야 했다. 걸음속도는 한 없이 느려졌다. 그래도 '집합시간' 내에는 도착할 수 있었다.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고, 곧장 데스크에 자리를 잡았다. 근조화환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 자리를 지정해 배치하며 인수 수령증에 서명을 했다. 오시는 손님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방명록 작성을 요청드렸다. 조의금 봉투를 받았다. 밀려드는 손님에 추가 주문되는 음식들의 주문 신청서에도 서명을 해 종류별로 정리해두었다. 옆에서 후배 직원은 열심히 손님들의 신발을 돌려놓고 있었고, 식사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우리들에게 일터였다.

급여가 주어지지 않을 뿐.




뒤편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인데 미안하다, 오늘만 부탁 좀 하자."

그 미안함과 고마움은 직원들이 아닌, 부서장들에게만 전달되었다. 그들에게 우리는 그저 본인이 동원할 수 있는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 너에게 군사 백을 주마, 이를 이끌고 가 임원의 부친상을 잘 치르고 오라! 현실을 반영하여 삼국지를 새로 쓴다면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아닙니다, 내일까지 저희가 돕겠습니다."

우리 팀장의 대답 소리가 들려왔고, 절망에 빠지는 순간. "에이, 그건 아니지!"

하며 정의의 사도가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우리 옆 팀장이었다.

"오늘 저녁까지만 거기서 하고, 오늘 밤은 우리 팀이 여기에 있을 테니, 내일은 C팀과 D팀이 교대하면서 하자고."

하아, 그럼 그렇지... 그래도 내 일요일을 구해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잠시 후, 사장을 필두로 임원 수십 여명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현장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마치 이곳의 주인공은 고인도, 상주도 아닌 그들인 듯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었던 임원 분들도 몇 분 계셨는데, 나를 보자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냐?"라는 질문에 하마터면 "그러게요."라고 대답할 뻔했다. 멋쩍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저녁. 도착한 다른 팀의 직원들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우리는 눈빛으로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고생 많으셨어요, 수고하세요.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 참 길었다.




주말에 임원의 경조사가 있다며 불러낼 때, 서로 자기네 부서원들 시켜서 하면 된다고 투닥거리는 부서장들을 볼 때, 정작 고인의 가족들은 하하호호 떠들거나 휴대폰에 얼굴을 묻고 본인의 일을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떠넘길 때. 나는 언제쯤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우리 아빠 일도 아닌데, 제가 굳이..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