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글에서 쓴 것처럼 본업과 전원생활을 하다보면 눈코뜰 새 없이 바쁘다. 그렇지만 이곳에 왔으니 또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들도 이리저리 찾아보니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사람들이 흔히 소도시에는 문화생활이나 여가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있을 때는 코로나 시국 이전 기준으로 1주일에 한 편 정도 영화를 보고, 한 달에 두 세 번 공연, 전시를 보고 서점에는 주에 두어 번 정도? 가곤 했다. 작은 갤러리나 독립서점, 공방같은 데도 자주 지나갈 수 있는 위치에 살았고, 그러다보니 문화나 여가 생활이 일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다. 이런 내 생활을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은
"심심하지 않을까"
하며 나의 도시 탈출을 걱정했다.
그런데 영월에 와보니 생각보다 할 게 많았다.
우선 나는 영월 사람이 아니니 영월 관광을 '해야만' 했다.
서울 사람은 남산 타워나 경복궁을 가지 않지만, 영월에 온 서울 사람은 장릉에도 가야 하고 청령포에도 가야 하고 한반도 지형에도 가야 한다.
이밖에도 여러 계곡이나 미술관, 박물관들이 많아서 하고 싶은 걸 정리만 했는데도 리갈 패드 한 장이 꽉 찼다.
내가 관광객처럼 돌아다닌 것들을 목록화해서 정리만 해보자면
사진박물관
법흥사
적멸보궁 법흥사
청령포
별마로 천문대
영월 와이파크
한반도 지형
고씨동굴
인도미술박물관
망경산사/만경사
장릉
김삿갓 계곡
이 있다.
특히나 영월군청에서 지원하는 영월 1주일 살기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영월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발견해서 찾아보고 경험해야 했다.
영월은 땅이 크고 길기 때문에 동선을 잘못 짜서 만약에 주천과 상동을 하루에 동시에 한다고 하면 서울에서 영월을 오고가는 것과 맞먹는 (강동 기준) 시간을 차에서 보낼 수도 있다.
영월에 오면서 또 계획한 건 언젠간 꼭 해봐야지 하고 To-do-list에 npc처럼 존재하던 걸 해보는 거였다. 하면 재밌을 것 같은데 일상에서는 시간을 내기가 어렵거나, 그만큼 priority가 아니라 항상 밀리고 밀려 '꼭 해보고 싶다'로만 존재하는 것들.
그렇게 내가 한 건
꽃차체험 - 농장에 가서 직접 캐모마일을 채취하고 (같은 구민 주민이신데 귀촌하신)농원 사장님 부부와 차담을 했다.
꽃이 어떻게 수분이 되고, 단순히 말리면 되는 줄 알았던 꽃차의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는 '사먹자'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됐다.
도마 만들기 - 캄포 도마는 언젠가 사야지, 다음달 월급 들어오면 도마 바꿔야지 했지만 항상 플라스틱 도마를 벗어나지 못했다. 우연히 도로에서 '도마 만들기 체험' 이 있다는 걸 보고 부리나케 전화해서 했다. 사모님은 알고보니 동향. 백운호수와 맛집 이야기를 하다보니 도마가 완성이 됐다.
카빙- 도마 사장님이 이동네에 카빙하는 곳도 있다고 해서 도마 체험을 마치고 오는 길에 전화를 드려 그 다음날 바로 다녀왔다. 기계가 아니라 손으로 깎는 카빙은 전날 한 도마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이 알고보니 업계 대선배라 '아...역시..' 하면서 역시 비슷한 업계,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또 한 번. 소개해주신 콩국수집에서 왜 영월 콩국수집에서는 '고추'를 주는건지, 서울의 진주집과 진주회관과는 다른 고소한 맛의 콩국수를 먹으며 영월과 지역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템플 스테이- 영월에서 가장 큰 절이라고 하면 사실 적멸보궁인 법흥사겠지만, 내가 관심있는 건 채선요리, 나물이었기 때문에 패스. 우연히 들어간 망경산사가 너무 좋아서 스님을 뵙고 여기서 체험 프로그램이 뭐 없냐고 하다가 바로 그 자리에서 1일 템플스테이를 신청했다. 망경산사는 산나물밭이 있는데, 그걸 직접 따고 체험하는 것이었다. 나물때문에 영월까지 온 나한테 딱 맞는 체험이었는지도.
이밖에도 내가 한 건 꽤 많다. 특히 인스타그램에서 만난 영월분들을 실제로 만나면서 꽤나 동네 사람처럼 이곳저곳 다녔는데
영월 상동읍에 있는 밭멍 농장 방문 - 퍼머컬처와 우핑, 이런 거에도 관심이 가던 차였는데 실제로 준비하시는 분을 보고 앞으로 더 이런 걸 찾아보겠다며 은평구 마을 텃밭을 알아보게 됐다. 신기하게 같이 요가를 하던 도반님이 농장에 우퍼로 온다고 해서 세상이 넓고도 좁다는 걸 실감했다.
동네 카페 가서 멍때리고 책 읽기- 서울 북서부형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어딜 가나 비슷해서, 서부 시장에 중부내륙이라는 카페를 찾았고, 영월에 있는 동안 꽤나 자주 방문해서 커피 마시면서 인스타그램도 하고 친구를 불러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일도 하고 그랬다.
영월에 와서 느낀 건 이런 것 외에도 지자체에서 문화/여가를 키우려고 꽤 노력을 많이 한다는 점이었다. 볼링장, 클라이밍장도 있고 (코로나때문에 주소지 등록이 되어 있거나 직장이 이곳인 경우만 사용 가능하지만) 수영장이나 여러 체육시설도 큰 지자체의 정도로 잘 갖춰져 있다. 아르코 문화예술센터에서 문화인 거주 프로그램도 운영해서 마로니에 공원에서 주말마다 볼 수 있는 거리 공연이 꽤 자주 열린다.
극장도 있고, (물론 지금 코로나 때문에 신작이 없다..) 독립 서점도 있어서 감상회나 여러 프로그램들이 '꽤' 많다.
물론 비교 대상이 서울, 특히 내가 주로 지내는 마포(홍대와 상수, 합정), 서대문, 종로와 중구에 비교한다면 이게 뭐야 할 수는 있겠지만, 여기에도 있는 것과 여기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면 꽤나 즐겁게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다.
영월 생활이 며칠 남지 않아 각각의 프로그램에 대해 나열만 했지만, 이것들을 하면서 지나간 도로의 나무들, 하늘 색, 그리고 이곳에서 보낸 시간들은 매 순간이 여유로웠고 편안했다.
어느 정치인이 말했던 '저녁이 있는 삶'을 바란다면 이곳에서 삶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