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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한 Mar 18. 2024

세상의 모든 멋진 여성들

그들과 하나의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 만으로.



안타까운 말이지만 가끔 내가 살고 있는 나라가 무척이나 좁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허난설헌이 그러지 않았던가? 조선이라는 소천지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물론 나는 허난설헌처럼 뛰어난 재능이 있진 않지만 (우리 아버지는 내가 그런 재능이 있는 딸이라고 생각하셨다.) 나라가 좁은 건지 아니면 내가 사는 세상이 너무 세속적이고 사람들이 브랜드라면 환장해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만 어찌 되었든.


최근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내 지식들이 팽창하는 것에 비해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나눌 필요는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글로서 정리되지 않는 면이 말로 - 누군가에게 말함으로써 정리되는 일도 많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주변에는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도 그런 것에 관심 있는 사람도 없어서 나 혼자서 계속 몇 년 동안 나의 지식을 질질 끌고 가는 일을 반복해 왔다.


백아의 종자기처럼. 어디에서도 나와 세상을 나눌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외로웠다.

하지만 남들과 같은 관심사를 갖고 살면 분명히 이야기할 사람은 많겠지만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그런 의미 없는 인간관계에 에너지를 쓰고 싶지도 않았다. 이미 외로워서 남의 틀에 나를 맞추는 헛짓은 아주 많이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이 외로움. 내가 스스로 지고 가야 하는 원죄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삶은 역시 경험을 해봐야 하는 것인가.

나에게 현명하고 멋진 여성인 마조리와 함께 새로운 여성동지를 나에게 주었다. 바로 유리.



유리는 내가 작년 일본에서 우연히 술집에서 만난 - 또 술집이다 - 3인조 일본인 중 유일한 여성이다.

1년 동안 주기적으로 내가 일본에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유리를 만났는데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 혼자 일본에 간 것은 몇 번 되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언제나 우리는 단체로 만나고. 단체는 그렇게 길게 이야기할 기회가 없으니까.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유리와 니힐리즘과 일본의 자연재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유리와 너무 말이 잘 통하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유리는 철학과를 나와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여성이었던 것.

한국에서 매우 보기 드문 스펙의 그녀와 나는 밤을 새우고 다음날 점심까지 이야기가 끊이지가 않았다.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면서 배경 지식을 설명하지 않아도 돼 느낌으로 알 수 있어!

혼자서 너무 외롭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마조리와 유리와의 대화는 큰 지적 자극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여성이다. 넓은 세상을 보고 자기만의 색깔로 세상을 물들이는. 그런 멋진 여성들과 함께 한 세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이나 고무되었다.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을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 어딘가 그리자벨라처럼 - 지금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공감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며 이제 나도 다음 세대에게 넘겨줄 나이가 된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던 나에게는 그냥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어서 나 혼자 외로운 거라고. 저 넓은 세상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분명 있다는 확신. 그것이 내가 이번 여행에서 얻은 가장 큰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넓고 내가 가야 할 곳은 많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멋진 여성들이 그곳에 있고 그들과 하나의 연대를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만큼 멋진 것이 어딨 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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