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금호 Sep 24. 2024

독일에서 첫번째 이직하기

6년을 다니던 독일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작년말부터 시작된 미국 IT 업계에서의 대량 레이오프를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경기 침체가 본격화되어 가급적이면 현재 다니는 직장에서 최대한 버텨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경기가 지금보다 더 나쁜 상황으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단단히 대비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때에 본의 아니게 독일에서 첫번째 이직을 하기 위해 지난 몇개월간 고군분투를 해왔었고, 지난 주말에 새 회사의 근로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반년이 넘는 이직 과정에서 내가 경험한 내용을 여기에 공유하고자 한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해보겠다.


1. 강력한 독일의 노동자 보호법


지난 2월 중순쯤, 팀 리드가 IPO 준비를 위해 다운사이징(레이오프)가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주었다. 그리고 R&D 책임자, HR 책임자와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6월에 와이프와 딸내미의 영주권을 위한 이민청 테어민이 잡혀있다는 것을 미리 언급한 상태라, R&D 책임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1개월을 더 다닐 수 있게 해주고 레주메 리뷰 및 회사와 일하는 헤드헌터를 통한 구직 지원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노티스 기간(notice period)은 3개월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3월말에 해고 통지를 받으면 6월말까지 다니는 것이지만, 내 경우에는 4월말에 해고 통지를 받고 7월말까지 다닐 수 있게 해주겠다는 의미였다. 일단 내 이민 변호사와 상의를 해보겠다고 했는데, 회사 동료들은 물론 평소 친하게 지내던 HR 책임자까지 일단 고용 변호사를 선임하라는 조언을 해주었다. HR 책임자인 그녀는 다른 직원들에게는 냉정하게 대해서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데, 평소 친했던 덕분인지 꽤나 많은 도움을 주었다.


베프에게 추천 받은 변호사와 만나 현재 상황을 공유하니 약 4~5개월 급여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받아주겠다고 했다. (참고로 독일은 법으로 정해진 퇴직금은 없지만, 회사에 따라 협의 가능하다) 다만, 이민청 테어민이 잡혀있기 때문에 이것을 무사히 마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기로 하고 이민 변호사와 협의를 해보기로 했다. 내 고용 변호사는 우호적인 HR 책임자와 직접 협의를 진행하며, 이민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가족들의 영주권을 무사히 승인을 받기 위해서는 나의 고용 계약은 프로베짜이트(수습기간)이 지났고 해고 통지를 받지 않은 상태의 무기한 고용 계약이어야 했다. 따라서, 3~4월 해고 통지가 아닌 이민청 테이민 이후인 6월 해고 통지로 변경하고, 9월말까지 노티스 기간 3개월은 Garden leave(일을 하지 않지만 고용 계약이 유지되는 상태)로 한 다음 노티스 기간 내에 취업이 되면 남은 기간에 대한 급여는 퇴직금 형식으로 지급하는 방안이었다.


가족들의 영주권 취득이 얼마의 퇴직금을 더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동의했고, 변호사는 회사와 협의해서 구두로 합의를 했다. 아무리 합의했다고 해도 여러가지 변수가 있을 수 있어서 이민청 테이민이 잡힌 당일 날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무사히 가족들의 영주권은 승인되었고 합의한 대로 6월말에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서면으로 받았다. 6월말에 마지막 출근을 해서 노트북과 회사 키를 반납하고, 회사 동료들과 환송회를 하고 선물을 받는 것으로 6년간의 독일에서의 첫 직장 생활은 마무리 되었다. 연방 노동고용청에 구직자 등록과 실직자 등록까지 했으니, 이제 남은 3개월간 취업 활동에 집중해야 하는 것만 남은 것이다. 한국과 독일을 통틀어 생전 처음 해고를 당한데다가, 취업이 쉽지 않은 시기에 취업 활동을 하느라 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이번 경험은 독일의 노동자 보호법이 얼마나 강력한지 직접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에서 직장을 잃을 위기가 닥쳤다면, 이렇게 반년 넘게 급여를 꼬박꼬박 받으며 중요한 개인적인 일(영주권)을 제대로 마무리하고 다음 직장을 위한 구직 활동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지 장담하긴 힘들다. 다만, 독일 생활 7년째임에도 실직과 구직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가짐은 아직까지도 따라가기가 어렵다. 친구들과 동료들은 이번 기회에 푹 쉬면서 재충전을 하고 천천히 다음 직장을 구하라고 조언을 해주는데, 한국 사람인 나로써는 도무지 그렇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6년 넘게 회사를 다녔으니 최소 1년 이상은 실업 급여가 나오겠지만, 한번도 실업 급여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한동안이라도 실업 급여를 받고 생활하는 것 자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6년전에 경험 했듯이 깎여나가는 자존감을 커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추스리고 전문의로부터 심리 상담까지 받으면서 구직 활동에 전념하는 수 밖에 없었고, 6년전에 독일에서 첫직장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었는지를 다시금 뼈저리게 깨닫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2. 더이상 매리트가 없는 한국 IT 업계


나는 독일 영주권자이기 때문에 6개월에 한번 독일을 방문하면 영주권을 유지할 수 있어서, 이번에는 독일 회사 뿐만 아니라 한국 회사들에도 지원을 했다. 내가 6년간 몸담았던 3D 프린터 분야나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온 AI 분야의 한국 회사들로부터 오퍼까지 받았으나 결국 성사되지 못했다. 한국도 경기가 안좋아진 탓에 오픈된 잡 포지션이 많지 않았지만, 내가 꼭 필요하다며 적극적으로 오퍼를 보내온 회사들의 조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6년전만해도 독일이나 한국이나 연봉이 큰 차이 없다고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차이가 꽤나 크게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굳이나 휴가나 병가와 같은 정부 차원의 기본 복지를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말끝마다 명문대 출신의 화려한 멤버들로 구성된 유망한 AI 회사라고 큰소리 치던 대표는 내가 꼭 필요한 인재라며 호기롭게 내가 한국에서 13년전에 받았던 연봉과 한국행 비행기 값을 제시했다. 또다른 AI 관련 회사는 내 조건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멋들어지게 오퍼 레터까지 보내오면서 온갖 폼은 다 잡더니, 입사일을 얼마 남기지 않고 사업을 접는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ㅎㅎ 3D 프린터 회사의 소프트웨어 부문을 책임져달라며 적극 영입의사를 밝힌 회사 부대표에게 연봉 조건을 메일로 보냈더니 회신조차 없이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런 예는 양호한 편에 속하고, 대부분은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헛소리하는 사람들 뿐이었다.


독일 회사들의 경우에는 코로나 이후, 완전 재택근무로 전환을 했거나 재택 근무와 출근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방식이 많이 자리를 잡았다. 내가 다니던 독일 하드웨어 스타트업 역시 일주일에 1~2일만 출근하면서 재택근무를 몇년간 해왔었다. 필요한 경우 EU 지역 뿐만 아니라 시간대가 크게 차이 나더라도 원격 근무를 허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한국 회사들은 상대적으로 연봉이나 근무 조건도 좋지 않으면서 무조건 출퇴근을 기본으로 하는 것 또한 인상적이다. 한국에서는 취업이 되더라도 고용 불안, 임금 체불이 심한데 이렇게 실질적으로 마이너스인 연봉 수준이나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변함없이 열악한 근무 조건이라면 더이상 알아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전 프랑크푸르트의 한국 대기업에 취업한 지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회사는 변한게 없구나"라는 말이 절로 나왔었다. 지난 몇개월간 천천히 살펴본 한국 IT 업계의 취업 시장은 여러모로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 입장에서는 아무런 경쟁력이 없었기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 같다.


3. 독일 IT 업계의 취업 시장 현황


전 세계 경기가 안좋기 때문에 당연히 독일 경제도 안좋은 탓인지 6년전에 비하면 오픈된 잡 포지션이 예전 같지 않았다. 이번 구직 활동에는 링크드인을 주로 활용하였는데, 내게 맞는 구인 공고를 제대로 리스트업해주는 것은 꽤나 유용했지만 링크드인을 통해 올라오는 구인 공고에 지원하는 지원자의 수가 꽤나 많아서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이 체감될 정도였다.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안좋아 올라오는 구인 공고가 많지 않은데다가, 미국에서 대규모 레이오프를 통해 구직자들이 늘어난 탓이라고 본다. 베를린은 독일어를 전혀 못해도 영어만으로 취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어서 이런 현상이 심한 것 같아보이는데, 독일어 B2, C1가 기본인 베를린 이외 지역의 구인 공고에는 그만큼 경쟁이 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구인을 하고 있는 회사들의 선발 기준이 꽤나 높아진 것을 실감했다.


독일은 한국에 비해 입사 지원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자동화 되어 있어서, 레주메 단계에서 자동 필터링 되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사용하던 레주메와 링크드인 프로필을 6년만에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받아 개선하고 업데이트를 몇차례 한 덕분인지, 상반기에 입사 지원을 할 때보다 점점 서류 통과 및 인터뷰 기회가 늘기 시작했다. 내가 부족해서 인터뷰를 망쳐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몇차례의 인터뷰를 잘 보고 코딩 테스트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떨어지는 경우도 계속 이어졌다. 피드백을 받아보면 내가 업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고 분명히 좋은 동료가 될 것이 확실함에도 불구하고, 그 이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으로 느껴졌다. 지금의 독일 IT 취업 시장은 주니어에게는 확실히 불리하고, 시니어라고 해도 제대로 된 영어(또는 독일어) 실력과 탄탄한 기본기는 물론 추가로 어필할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면 어영부영 시도해볼 수 있는 시장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경기가 안좋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회사들의 연봉 수준이나 근무 조건은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기본적으로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환경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존중하고, 앞서 이야기 한것처럼 풀 재택 근무나 하이브리드 근무가 기본이라 삶의 질에 신경 쓸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대부분의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제공되는 베네핏 뿐만 아니라 회사 마다 다양한 종류의 베네핏을 추가로 제공하기 때문에 이또한 꽤나 매력적이다. 게다가 일단 한번 고용되어 프로베짜이트를 통과하면 (회사가 망하기 전까진)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이 보장되고, 어느 회사를 다니든 연간 최소 20일 이상의 휴가와 최대 30일까지의 병가를 사용할 수 있으니 더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독일인이든 외국인이든 약 6개월~1년 정도의 구직 기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2~3개월 전에 지원한 회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는 것이 다반사고, 한 회사에서 몇차례의 인터뷰와 코딩 테스트를 하다보면 한달 정도가 훌쩍 지나가는데 거기서 떨어지면 그 타격이 만만치 않다.




몇개월간의 구직 활동을 해오던 중, 링크드인에서 지인이 좋아요를 누른 포스팅이 내 피드에 떴다. 내용을 읽어보니 내가 몇년간 개인적으로 준비해오던 ML 연동 프로젝트나 생성형 AI를 활용한 프로젝트와 연관이 있는 AI 스타트업이었다. We are hiring이라는 문구를 보고 망설임 없이 지원서를 접수했고, 해당 회사의 CEO와 친분이 있는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CEO가 나의 레주메에 좋은 인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일주일후에 CEO와 CTO를 온라인 인터뷰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주일 후 베를린 사무실로 나를 초대해서 2시간 30분간의 워크샵을 가지고 나서, 악수와 허그를 하며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했다. 주말에 정식으로 잡 오퍼를 받았고, 또다시 일주일 후에 CEO의 약속대로 최종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다. 독일 회사 답지 않게 불과 4주만에 신속하게 확정된 놀라운 일이었지만, 자존감이 깎일대로 깎인 상태였던 탓인지 기대만큼 좋은 연봉에 기대보다 높은 수준의 스톡옵션까지 받는다는 것이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다.


2010년, 나는 몇년간 개인적으로 준비했었던 모바일 프로그래밍 (Window Mobile, Andriod, iOS) 덕분에 한국 시장에서 스마트폰 붐을 타고 나의 커리어를 크게 바꿔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내 커리어가 그때와 비슷한 시기라고 판단된다. 정신없이 업계의 판도가 요동치는 이러한 시기에 나는 과연 얼마나 더 오랫동안 나의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까지는 운이 좋게 시대의 흐름에 맞춰 커리어를 이어올 수 있었지만, 과연 다음에도 그것이 가능할지 확신할수가 없다. 하지만, 좋은 인연 덕분에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얻었으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최선을 다해 나 자신을 모두에게 증명해보일 것이다. 지금 이 어려운 시기에 구직 활동을 하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작가의 이전글 예정에 없던 한국 방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