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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Dec 31. 2022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참고 못 먹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겁니다


“나 이제 고기 안 먹어. 우유도, 계란도 다”


나의 선언은 맑은 물에 보라색 물감이 한 방울 떨어졌을 때 천천히 오염되듯 분위기를 멜랑꼴리 하게 흐려버리는 발언이 곤 했다.

납득이 안 간다거나, 정말 진심으로 궁금해서 이유를 묻거나, “네가 고기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하며 얼마 안 간다느니 나조차도 알지 못하는 나의 미래를 점치는 행위를 한다. (그럴 거면 로또 번호나 알려주지?) 나의 모든 주변인들이 그랬다.


반복되는 물음에 나는,

반응들이 무섭고 낯설어 채식하는 것을 숨기거나, 굳이 언급하지 않았었다. 스스로 방어했고, 나름의 인간 간의 평화(?)를 깨기 싫어 숨기곤 했다. 보통 한국인들의 회식 혹은 모임의 주최지가 채식인에게 불리한 환경인 것을 생각한다면, 어쩔 수 없이 밝혀야 하는 상황이 오곤 했는데, 그럴 때면 다가오는 시선집중이 내게는 수치스러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별종인 것 마냥 취급받는 그 레퍼토리가 너무 뻔하고 지겹기도 했다.

연인과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현재는 그도 (불과 몇 주 전이다) 비건 지향을 선언하고 나보다 더 앞장서서 건강한 가치관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나의 초기 채린이 시절에 비건 옵션이 있는 식당을 찾으려 노력하지 않는다거나, 채식을 하는 사람을 위한 외식자리가 많지 않다는 것에 무력감을 표하기도 했고, 앞날에 대한 걱정이 있기도 했었다.

채식을 하는 초기에 나는, 굉장히 외로웠다. 그토록 좋아했던 예능 <신서유기>에도 동물을 맛있게 먹거나 하는 장면들을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위화감이 들었다. ‘정말 사랑하는 프로그램이긴 한데, 이 장면은 이제 마냥 유쾌하게 보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단념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삶을 함께하기 위해서, 비채식인인 그를 위해, 강요하지 않을 거고 그를 위한 요리도 해야겠다-라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나는 소극적인 사람이었다. 채식을 하게 되며 초기에 얻은 건강적인 이점들을 널리 널리 설파했음에도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많이 단념을 했던 것 같다. 생각보다 꼰대 같은 행동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본인 스스로도 ‘건강’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도 했다.

이것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다고 근래에 느낀다. 나 역시도 채식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몸을 죽이는 자본주의 밥상>과 <What the health> 두 가지가 가장 큰 요인이 되었는데, 그 당시에 일적으로도 심적으로도 건강이 좋지 않아 단순히 이기심으로 인한 “시도”였다.

내 몸과 삶으로 느끼는 변화는 채식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굳혔고, 지속하려 보다 보니 시야가 넓어졌다.

채식을 하는 것이 단순히 [건강]이라는 카테고리에 국한된 것이 아닌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라는 거다.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이 인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거다. 나의 건강만이 아니고 모든 감정을 느끼는 살아있는 동물들을 위한 것이라는 거다.


나 또한 “동물”로 살아가면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태어나고 지속적으로 행해온 내 삶이 너무나도 개탄스러워졌다. 논문이나 다큐멘터리에서 밝혀지듯 과학적으로도,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로도 밝혀진 이 “동물”의 사체를 먹음으로써 오는 모든 결과들은 인간의 몸을 해롭게 하기도 하거니와, 자연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내 삶을 지켜내고 유지하면서 느끼는 것은 나는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갈등도 원치 않는다. 물론 필연적인 갈등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 그것 역시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를 이뤄내는 과정이라는 전제하에 인정을 한다.

하지만 채식인과 비 채식인의 싸움은 진흙탕 싸움이다. 최근 어떤 종류의 갈등을 보더라도 흑과 백의 싸움이다. 모 아니면 도다. 정답이 도출되지 않은 채 상대방의 귀에 확성기를 대고 소리를 지르는 싸움을 한다. 피가 나고 고막이 터지더라도, 굴하지 않는다. 모든 이에게는 내가 맞고 너는 틀리기 때문이다.


때로는 방관자의 역할을 하고 싶기도 하고, 조금 참견을 하고 싶기도 하다. 나는 나의 삶의 터전을 지키면서 소중한 존재를 지키려고 조금 노력을 보태는 삶을 선택한 건데,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좋을 테니까 말이다.

가령 이런 상황의 경우이다


“ㅇㅇ씨 베이컨 구울 때 먹고 싶지 않아요? 참는 거 좀 힘들죠?” 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내게 보인다.

(이 상황을 잠시 설명하자면 나의 직업은 월급쟁이 제빵사이고, 샌드위치를 싸는 분에게 필요한 베이컨이나 치킨과 패티 등을 구워주곤 한다. )


솔직히 울컥 화가 치미는 상황이다. 멋대로 판단하는 사람 정말 싫다… 고  생각하며 후- 숨을 한번 내쉬고 나는 대답한다.

“아니요. 못 먹어서 참는 게 아니라 안 먹는 겁니다.”라고.


더 덧붙이고 싶지 않다. 원치 않는 알량한 동정심을 표하며 그 사람은 나를 동정했는데, 거기에 1%라도 동조하고 싶지 않은 나의 자존심이다.

이럴 때 나는 방관자가 된다.

내가 이 이로운 가치들을 널리 설파하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좋겠지만 부끄러운 건지, 자신이 없는 건지 모르겠는 나는 앞으로도 종종 방관자로서 바라보기도 할 테다. 누군가 비겁하다고 말한다면 … 그것 또한 생각해 볼 일이겠지만, 고백적인 이야기를 쓰는 이 공간 역시도 나에게는 일종의 도전이기도 하다.

앞으로도 나는 비건일 거고,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지켜낼 거니까, 조금은 묵묵하게 행동하는 것에 의의를 가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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