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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티서 Oct 15. 2021

일반 반 친구랑 연애한 썰

9p. 17살의 태티서

2007년 10월 15일

쌀쌀한 바람이 분다. 내 마음처럼.


  축구부 선배 썰, 형 친구 썰, 과외 쌤 썰, 군대 후임 썰, 심지어 친여동생의 남자 친구 썰까지. 오늘도 온갖 썰들을 읽으러 히즈카페에 접속한다. 새삼 이 카페 유저들의 짝사랑 상대도 정말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애틋한 썰이나, 짱 야한 썰이나 모두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다만 너무 허황된 이야기는 싫다. 애초에 썰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건, 곧 그 이야기가 실화라는 약속이 아니던가? 주인공이 거의 전교생의 절반 정도를 꼬시는 썰이라고? 흥, 그런 망상은 제발 혼자 일기장에나 적어주길.


  내가 무난하게 좋아하고, 또 카페 회원들도 언제나 환영하는 썰은 바로 일반 친구와 관련된 썰들이다. 이런 썰에는 종종 응원이나 충고 댓글도 달린다. 너무 마음 아픈 기대 말라고. 아직 어린 친구인 거 같은데, 걔도 널 좋아할 리 없으니 발 닦고 잠이나 자라고. 요약하자면 결코 사랑이 이뤄질 리 없다는 뜻이다. 일반과의 연애라니, 나도 참 달콤한 망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기대가 너무 커서 현실을 왜곡해 볼 뿐이라고 여겼는데. 형진이를 만나고, 모든 게 달라졌다.


  처음 형진이를 봤을 때 나는 걔가 쫌 동네 광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사람 좋다는 소리 많이 듣지만, 딱히 내가 친해지고 싶지는 않은. 껍데기는 있지만 알맹이는 없을 것 같은. 은근히 귀척도 하는데 다른 애들 눈에는 그 뻔한 수가 잘 안 보이는 그런 애. 첫인상 평가가 박한데, 아무튼 형진이가 내 학원 친구의 친구였어서 나도 곧 형진이랑 알게 됐다. 그 뒤로 몇 번 밥도 같이 먹고, 수업 끝나고 놀러도 가게 됐다. 그럴 때마다 형진이가 나한테 엄청 잘 해줬다. 난 비사교적인 아이니까 아마도 그런 나의 마음도 자기가 얻고 싶었나 보다. 약간 도전심리 같은?  


  그런 걔 때문에 나는 집에 가서 생각이 엄청 많아졌다. 아 씨, 얘 왜 나한테 잘해줘. 나한테 왜 친절하게까지 해줘, 같은 남고생이잖아. 제발 다른 보통 애들처럼 쿨한 듯 불친절하게만 굴라고. 좀 정 떨어지게, 딱 그렇게만 하라고. 물론, 나는 그런 행동에 다 상처받는 타입이지만, 그래서 걔들이랑 완전 어울리지는 않는 한 발자국 물러난 자리에 있는 거지만, 이제 그건 그래도 익숙하다. 형진이는 자꾸 안전거리 안으로 바싹 다가온다. 자꾸 내가 분리해 놓은 나만의 자리를 침범한다.


  ‘내가 비사교적이라서 더 챙겨주려고 그러는 건가? 최대한 좀 무뚝뚝하게 굴어볼까?’


  그렇게도 마음먹어 봤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아니, 씨발 애초에 나는 게이라서 보통 남자애들이 불편했던 거잖아. 근데 그런 나한테 왜 도망가냐면서 남자애가 막 친절하게 구니까. 그럼 나는 더 막 걔를 자연스럽게 대하기가 불편해지고. 그러면 걔는 ‘어, 얘 또 왜 멀어지지?’ 하면서 더더 잘해주고. 하교 할 때도 나 기다리고. 막 어디 애들이 가자고 그러면 티서도 껴서 가자고 항상 자기가 말 꺼내고. 그럼 나는 걔가 더더더 불편해지고. 그럼 걔는 나를 더더더더 챙겨주고, 그럼 나는 더더더더, 더더더더더, 더더더더더더, 아 씨발. 게이인 것도 서러운데 제발 망상에는 안 빠지게 해주세요.


  하지만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형진이를 좋아하고 있었다. 한번 마음이 생기니 의외로 내 태도도 쉽게 달라졌다. 어라, 얘가 이렇게 눈썹이 진했던가? 턱이 너무 날렵하다 거의 강동원이네, 강동원. 와, 하얀 피부 아이돌 좋아하는 애들은 다 바보 같아. 형진이 좀 봐, 까만 피부가 진짜 훨씬 섹시하잖아. 섹시하다는 말까지는 못 했지만 내가 얘한테 칭찬을 많이 해줬던 것 같다. 얘는 내 진중한 면, 영리한 면을 정말 좋아해 줬다. 그 뒤로 우리는 일종의 베프 같은 것이 되었고, 원래 알고 있던 학원 친구까지 해서 셋이 항상 다니게 되었다. 실은 그 학원 친구는 그냥 알리바이 같은 존재였다. 여자애들이라면 또 몰라, 남자애 둘은 둘이서만 다니면 좀 이상하게들 보니까.


  “나는 네가 엄마만큼 좋아. 아니, 엄마보다도 네가 더 좋아. 전에는 그냥 얄팍한 관계들뿐이었어. 널 만나고 내가 엄청 변했어. 이렇게 누굴 좋아하는 것도 나는 처음이야.”


  그러던 어느 날 형진이가 이렇게 말했다. 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 말을? 카페에선 망상 좀 자제하라고들 했다. 일반한테 네가 예뻐 보일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으니, 발 깨끗이 씻고 잠이나 자라고 했다. 아니 근데 엄마만큼 좋다는데? 근데 이거 칭찬 맞지? 나는 형진이를 떠올리면서 한 번도 엄마를 떠올린 적은 없었지만. 뭐, 그래도. 심지어 엄마‘보다’ 좋다는데. 기본적으로 회의적인 나였지만, 그때는 나도 좀 감동을 받았었다. 좀 믿음이 생겼다. 일반이랑 연애하는 썰은 다 가짜라고? 모르고 욕들 하지 말아라 뭇 게이들아. 여기 이렇게 실제로 사랑이 시작되고 있지 않느냐!


  아무튼 그 뒤로 형진이에 대해 좀 더 속속들이 알게 됐다. 알고 보니 형진이는 좀 마마보이기는 했다. 완전히 엄마한테 잡혀 살았다. 형진이가 어렸을 때 설소대 수술을 받았다고 했을 때는 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왜 애기들 영어 발음 좋아진다는 미신 때문에 혓바닥 아래 기둥 조금 자르는 그 수술 말이다. 아들 영어 엘리트 만들려고 그 정도까지 하는 집이란 말이야? 하긴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내가 다니는 학교가 서울 소재의 외고이기는 했다. 아무튼 고맙기는 했다. 어쨌든 나를 그만큼 가깝게 생각하니까 저런 이야기도 해주는 듯 싶어서.


  형진이가 나를 좀 부담스러워한 것은 2학기가 시작된 이후부터였다. 더 정확히는 형진이가 좀 다른 반 소위 잘 나가는 애들한테도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 아니, 그게 아닌가? 사실 내가 좀 걔를 부담스럽게 하기는 했다. 걔가 뭘 잘못하면 내가 걜 너무 쥐잡듯이 잡았나 싶기도 하다. 그때도 처음에 뭐 때문에 화가 났는진 모르겠지만, 걔가 나한테 사과를 안 하길래 너는 왜 나한테 사과를 안 하느냐고 또 내가 물었었다. 형진이 대답이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사과를 해본 적이 없댄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사과를 안 하고 살 수 있어? 하긴 우리 아빠도 딱 그런 사람이기는 하지. 분명 내가 좋아서 붙어 있는 앤데 이럴 때는 완전 웬수 같다.


  아무튼 2학기 이후로 형진이와 싸우는 일이 많았다. 공교롭게 그때부터 우리 둘에 대해 말도 많았다. 예를 들어서 영어 독해 선생님이 내가 형진이 어깨에 기대서 자고 있는 거 보고 징그럽다고 한 거. 우리 원래 항상 그래왔는데, 왜 지가 막 징그럽다고 하고 난리지? 그 선생님 피부가 홍익인간인 새신랑 쌤인데 신혼여행 갔다 오더니 우리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몰디브가 흔들렸다고 지가 먼저 자랑했다. 우엑, 소름끼쳐. 나는 그게 더 징그럽다. 아무튼 이런 소리들이 뭘 알고 하는 구체적인 소리까지는 아니지만 굉장히 신경쓰인다. 무엇보다 이런 얘기 들을 때마다 형진이가 나를 더더 부담스러워할까봐 걱정된다. 형진이는 체면을 엄청, 엄청 신경쓰는 애란 말이다.


  형진이랑 싸우면 그날은 내내 책상에 엎드려서만 보낸다. 그럴 땐 내가 완전히 혼자처럼 느껴지는데 형진이는 또 절대 먼저 말을 안 걸어준다. 평소처럼 이 반에 저 반에 찾아다니면서 낄낄 떠든다. 너무 분한데, 나 혼자 마음을 삭힌 뒤 아무렇지 않은 척 형진이와 다시 노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괜히 또 화내면 나를 더 부담스러워 할테니까. 아니, 처음엔 내가 벅차서 잠도 못 잘 정도로 스윗하게 굴던 형진이인데. 이제는 왜 내가 일일이 형진이의 눈치를 봐야만 하는 걸까. 근데 걔도 지쳐 보이긴 한다. 애초에 우린 서로 원하는 게 전혀 달랐을 테니까. 나도 처음엔 다 망상인 줄 알고 시작한 관계였는데. 어느새 내가 너무 진지해져 있었다.


  그 이후에 우리의 관계는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하는 회원들 많으면 2탄도 이어서 쓴다.


 + 덧. 요새 모의고사다 뭐다 너무 바빠서 이후 사정은 간단한 요약으로 덧붙임. 간단하게 말하자면, 걔네 엄마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됨. 걔네 엄마가 나 이상한 애 같다고 멀리하라고 함. 근데 그걸 또 걔가 나한테 말함. (지금 생각해보면 내 얘기도 얘가 지 엄마한테 쓸데없이 많이 전했지 싶다. 자기 엄마 얘기 나한테 했을 때처럼. 무튼.) 학부모들 사이에 얘기가 어떻게 돌았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완전 이상한 애가 됨. 얘 엄마가 또 엄청 마당발임. 덕분에 우리 엄마도 학부모 모임에서 빠지게 됨. 엄마가 나한테 친구를 힘들게 하면 안 된다고 훈계함. 나는 이제 좀 정떨어져서 얘랑은 얘기 안함. 어차피 형진 말고도 친구는 있음.

 

 + 덧2. 사실 위에 적은 것처럼 쿨하고 싶은데 너무 열이 뻗침. 요새 우리는 절교 했는데, 가끔 쉬는 시간에 얘 떠드는 목소리 들으면,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음.


 + 결론. 그러니까 학부모들 사이에서 좀 이상한 해 될 각오 돼 있는 애들만 일반 반 친구와 연애하는 망상을 시작하시길....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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