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티서 Oct 18. 2021

그의 낮은 숨소리

10p. 19살의 태티서 

2009. 10.18.

밖을 오래 돌아다니기에는 꽤 쌀쌀해진 날


  아빠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평소에도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때는 뭐랄까? 좀 괜히 각을 잡는 느낌? 아빠가 안방 컴퓨터 의자에 앉아서 나는 자연스레 침대에 걸터앉게 됐다. 그러고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나와 잘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좀 짜증이 났다. 나 안 그래도 학교 다녀와서 피곤한데. 바로 저녁 먹고 학원 가야 하는데. 또 어떤 이상한 소리를 꺼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아빠가 소모하는 시간이 좀 비일상적으로 길어졌다. 아빠가 너무 무게를 잡은 탓일까? 따로 문을 잠궈 놓은 것도 아닌데, 엄마 역시 안방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알고 있어?”

  신기하게도 아빠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나 역시 이 만남의 목적을 간파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잊고 지냈던 그간의 풍경들도 떠올랐다. 히즈 카페 인터넷 창을 최소화해놓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던 날이 있었다. 돌아와 보니 컴퓨터를 아빠가 잡고 있었다. 그날 내가 다시 컴퓨터를 하려고 하자 아빠가 되게 어색하게 그냥 자라고 했었다. 좀 더 할게, 하고 다시 컴퓨터를 확인해보니 히즈 카페 인터넷 창은 꺼져 있었다.

  그땐 그저, ‘민망하군.’이라 생각하고 말았다. 와, 그걸 어떻게 그렇게만 생각하고 말 수가 있지? 하지만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게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미 어느 정도 알아채고서 묻는 말일 텐데, 거기다 대고 아니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너무 쉽게 대답한 탓일까, 아빠는 재차 나에게 지금 이 상황을 옳게 이해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알아, 안다고. 이미 나는 온몸으로 이 상황이 굉장한 위급상황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다리가 자꾸 저려 왔다. 어쩌면 아빠는 그 단어를 내뱉는 역할을 나에게 떠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어떻게 ‘아, 내가 게이가 맞냐는 말이지?’라고 내 입으로 확인시켜 줄 수가 있겠는가. 내 덤덤한 무표정이 아빠를 점점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표정은 그 당시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결국 그 다음의 질문들을 아빠가 먼저 꺼냈다. 희한하게도 그 단어만큼은 절대 언급하질 않았다. ‘늙어서도 바뀌지 않는대.’ 아빠의 이 말에 특히 경멸이 담겨 있었다. 아니, 당연히 고딩 때부터 할아버지 때까지 한 인간이 떡 치는 장면을 파노라마식으로 상상하면 징하다 싶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겉으로는 그저, ‘응.’ ‘알아.’ ‘괜찮아.’ ‘괜찮아.’ 했다. 괜찮다는 말은 정말 내 진심이기도 했다. 

  아빠가 정신병원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좀 의외이기는 했다. 당장 공부를 좀 쉬고, 라니? 평소 광적이다 싶을 정도로 내 수능에 집착하던 부모님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중요한 공부를 쉬게 할 정도로, 지금의 이 ‘사건’(아빠는 이게 내가 고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일어난 사건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실은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남자를 좋아하는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의미란 말인가? 물론, 정신병원에 가기는 싫으니까, 나는 거기에도 그저 괜찮다고 대답했다.

  감정의 폭풍은 그날 밤에 찾아왔다. 밤늦게까지 학원 수업도 다 듣고 온 뒤였다. 아, 그래서였구나. 아빠가 이유 없이 나에게 소릴 질렀던 게. 딱히 싸울 의지가 없는 나를 경멸하듯 노려보고 갈궜던 게. 자동차 핸들을 꺾으며 그냥 죽자고 윽박질렀던 게. 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우리 집은 내 방이 따로 없었고, 나는 엄마 아빠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자야 했으니까. 지금도 아빠는 특유의 낮고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자기가 잠에 안 들었다는 사실을 한껏 티 내는 숨소리. 내뱉는 숨에 감정이 섞여 있음이 명백한 소리.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덩달아 숨죽이게 하는 소리.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 잠 못 들게 만드는 그 소리.   

  그 숨소리가 나를 너무 답답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빠가 저렇게 티를 내면 결국 엄마가 나에 대해 아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아빠가 나에게 꼭 오늘처럼 비열하게 굴었을 때 내가 집 안에 있던 약들을 종류 관계없이 털어 넣었던 기억도 났다.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다. 이렇게는 더 살 수 없겠다는 판단이었다.

  그 다음 날 나는 내 나름대로 가방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수건이랑 양말만 가방에 잔뜩 담을 때에는, 짐을 싸면서도 이게 맞나 싶기는 했다. 돈이라도 백만 원 훔쳐 갈걸, 따로 챙겨가는 금품은 또 없었다. 그날 지하철역에서 엄마와 헤어질 때, 어쩔 수 없이 내가 엄마에게 좀 격을 뒀던 것 같다. 엄마 역시 평소보다 더 선량하고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외로움만으론 엄마 역시 결코 나를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충 강서 쪽에 내려, 그쪽의 청소년 보호 센터를 찾았다. 막상 찾은 건물 앞에서 망설이다 결국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고, 이곳 말고는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센터장이라는 사람은 설경구 같은 날카로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내 나이와 출신 학교를 듣고는 느물느물 웃었다. “한 번 나와봤구나, 놀토기도 하고?” 그 말을 듣고는 좀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여긴 ‘정말’ 갈 곳 없는 애들이 오는 덴데, 나는 아니잖아 싶었다.

  그래도 게이 친구 외에 나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그 사람 앞이 처음이었다. 웃긴 게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나를 받아들일 때의 주의사항처럼 이야기하게 됐다. 꼭 내가 단체생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처럼. 실은 좀 자존심 때문이기도 했다. 무조건 받아달라는 거 아니다. 나도 뭐 속이는 거 없이 다 얘기하고 있으니, 날 너무 궁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하는 마음이었다. 

  이후 저녁을 안 먹은 날 위해 나보다 한 살 어린 어떤 남자애가 라면을 끓여줬다. 물 조절을 잘못해서 국물이 거의 하나도 없는 라면이었다. 내내 심각한 와중이었지만 그때는 속으로 좀 웃기기도 했다. ‘이거 지금 나 멕이는 건가? 아냐, 딱 봐도 이성애자 남자앤데 그런 의도였으면 차라리 밤에 때리겠지. 이성애자가 이런 뉘앙스를 알 리가 없어.’

  그날 밤 방에서 자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사무실에 가 보니 아빠와 그 센터장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까 순진하게도 내가 부모님 전화번호도 적으라는 대로 다 적어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퍽 진지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신기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뭐가 통하는 걸까? 아빠는 심지어 남들 앞에선 굉장히 상식적이고 자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실 아니면서. 나랑 얘기할 때는 둘 다 내 감정 따위는 신경도 안 썼었으면서.

  그날 나는 아빠를 따라 순순히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차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빠는 나를 차에서 내리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는 자기 신세 한탄을 한 시간을 넘게 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말에서부터 할아버지가 자기한테 얼마나 안 좋은 아빠였는지에 이르기까지. 나는 잠자코 들었다. 어제부터 쭉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나도 느낀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우린 서로 말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구나. 내가 그동안 왜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지?’

  아빠가 마지막으로 내게 ‘정상적으로 살 것을 다짐하라’고 요구할 때에는 좀 난감하기는 했다. 그야 뭐, 대충 알겠다고 하고 상황을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임을 머리로는 알았지만, 뭐랄까? 집에 못 들어가게 막고선 다짐을 받아내려는 그 꼴이 좀 협박처럼 느껴졌달까? 알겠다니까, 말은 짜증스럽게 내뱉었지만 내심 치욕스러웠다. 그동안 집은 그저 내게 나가고 싶은 공간이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니 집은 언제는 내가 내쫓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애초에 내 공간이 아니었다.

  내 가방에서 돌돌 말린 수건들을 꺼낼 때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저 누워서 숨으로 자기 분노를 삭이려던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까? 솔직히 헤아리고 싶지 않았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나대로 살아남기가 너무 바빴으니까. 나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일상으로 돌아왔고, 이제는 정말 수능이 며칠 남지 않은 때였다. 일단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의 낮은 숨소리를, 최대한 무시해야만 했다.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반 반 친구랑 연애한 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