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부터 7월까지는 매일매일 일과 대학원 수업, 과제에 지쳐있었다. 주말까지 온라인으로 한국어 강의를 했고, 강의를 하지 않는 날에는 수업 준비와 대학원 과제에만 매달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이러다 우울증이 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우울했다.
이런 나를 버틸 수 있게 한 건 바쁜 일이 모두 끝나는 8월 초에 예정된 베트남 여행이었다. 나는 베트남, 특히 내가 작년까지 약 1년 동안 살았던 하노이가 그리웠다. 유튜브나 TV에서 베트남 관련 내용을 봤을 때, 쌀국수를 먹을 때, 온라인으로 베트남 학생을 가르칠 때마다 하노이에 대한 그리움이 문득문득 솟았다. 한창 일에 치여 있었던 5월에, 8월 4일부터 12일까지 베트남에 갔다 오는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나서 그날만 기다렸다.
내가 그리워한 것은 하노이에서 지냈던 나의 일상이다. 나는 2021년 상반기에 하노이에 있는 주베트남한국문화원 세종학당 파견교원이 됐는데, 코로나로 인해 출국이 1년 넘게 늦어졌다. 출국을 기다리는 동안은 온라인으로 한국에서 근무를 했고, 2022년 4월부터 12월까지 하노이에 파견 가서 진정한 파견교원 생활을 했다. 파견교원으로 근무할 때 내 일과는 이랬다. 아침에 일어나서 용과나 망고에다가 달랏(Dalat) 산 무설탕 요거트를 아침으로 먹고 출근했다. 달랏 요거트는 약간 신맛이 나면서 부드러워 맛있다. 이 맛있는 게 1kg에 한국 돈으로 3500원밖에 안 해서 매주 사 먹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나서는 근처 식당에서 그랩(Grap) 앱으로 배달 음식을 주문해 먹거나 베트남 음식을 먹었는데, 내가 특히 자주 가는 식당은 반꾸언(Banh cuon)을 파는 식당이었다. 한국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육향을 머금은 어묵이나 갈비 육수와 같이 먹는 반꾸언은 정말 맛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문화원 바로 앞에 있는 Lane 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브라우니 혹은 치즈케이크를 같이 먹었다.
저녁 8시에 한국어 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에는 가끔 호안끼엠(Hoan Kiem) 호숫가를 산책했다. 호안끼엠 호수는 낮에 봐도 예쁘지만 해 질 녘이나 야경은 정말 아름답다. 주말에는 차가 들어오는 것을 통제하여 차 없는 거리가 되는데, 사람들이 많이 놀러 와 시끌벅적하다. 길거리 공연과 행사를 하는데 가끔은 콘서트나 패션쇼도 해서 분위기가 정말 활발하다. 나는 시끄럽고 산만한 분위기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호안끼엠의 이런 분위기는 좋아했다. 호안끼엠 산책을 한 후에는 내가 좋아하는 브레드팩토리(Breadfactory)라는 빵집에 가서 빵을 사 먹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옥상에서 맥주 한 잔을 하며 야경을 구경하거나 옥상에 있는 작은 수영장에서 수영이라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 물장구 비슷한 것을 하며 놀았다.
파견교원 계약이 끝나고 나서는 4개월 조금 넘게 어학연수를 했는데, 그때도 아침에는 과일을 주로 먹었지만 가끔은 집 바로 옆에 있는 껌빙전(Com binh dan. 밥과 국을 기본으로 주고 각종 반찬을 손님이 직접 골라서 먹을 수 있는 베트남 식당 종류)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한국 돈으로 1,000원밖에 안 하는 가격으로 배불리 영양적으로 먹을 수 있고, 주인 아주머니도 친절하셔서 좋았다. 오후에는 1시 반부터 4시까지 베트남어 수업을 듣고, 카페에 와서 배운 내용을 복습했다. 오후에는 역시 호안끼엠에 가서 산책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이런 하노이에서의 일상이 그리웠다.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lane 카페에 가거나 호안끼엠을 산책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래서 하루빨리 하노이 여행을 하고 싶었다. '하노이에 가면 먼저 반꾸언부터 먹어야지. 그리고 마트에 가서 용과랑 망고랑 달랏 요거트를 사서 호텔에서 먹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면 스트레스가 조금은 풀렸다.
여행 갈 날이 가까워져 오자 호안끼엠 근처 호텔을 예약하고 학생들과 하노이 파견교원 선생님들, 옛 집주인과 만날 약속을 잡는 등 여행 일정을 자세히 세웠다. 내 일정은 하노이 3박 4일 - 사파 2박 3일 - 다낭 2박 3일이었다. 하노이에서는 1년 전 하노이에 살 때처럼 일상을 즐기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나고, 사파는 혼자 여행하고, 다낭에서는 지금은 언니 동생처럼 지내는 후에 세종학당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같이 놀 예정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건 설렜는데, 막상 하노이로 가는 날이 되자 설레는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하노이에 도착해서 비행기에서 내릴 때도 색다른 느낌은 없었고, 그냥 청주에서 부산으로 KTX 타고 간 느낌이었다. 그만큼 하노이가 나한테는 아주 익숙하다는 거겠지.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에서 베트남에 있을 동안 쓸 현지 유심칩을 사고 환전을 했다. 유심칩을 사려면 여권이 필요해서 직원에게 줬는데, 직원이 내 여권을 보고 한국사람이었냐며 깜짝 놀랐다. 그전까지 베트남어로 이야기했는데, 내가 한국 사람인 걸 몰랐다면 혹시 베트남 사람인 줄 착각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발음이 좋았다는 거니, 시작부터 기분이 좋았다.
호텔 체크인을 하자마자 자주 가던 식당에 반꾸언을 먹으러 갔다. 하노이에 도착한 건 12시 30분, 점심으로 기내식을 이미 먹었지만 기내식으로 배가 차는 사람이 있을까?(나만 그런가?) 허기진 배를 반꾸언으로 채우며 점심을 두 번 먹었다. 반꾸언은 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향 가득한 어묵과, 어묵 국물에 푹 담가 먹는 반꾸언은 정말 맛있다. 갈비 국물과도 같이 먹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배가 불러 못 했다. 반꾸언을 먹고 나서는 마트에서 용과와 망고와 요거트를 사서 호텔로 왔다.
저녁에는 호안끼엠에서 학생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약속 시간 전에 미리 호안끼엠에 가서 산책을 했는데, 마침 주말이라 분위기가 좋았다. 관광객들로 시끌벅적했고, 역시 여기저기서 다양한 길거리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음악에 맞춰 춤추며 운동하는 아주머니들, 댄스 동영상을 찍는 학생들과 소수민족 복장을 하고 전통 춤을 추는 사람들... 활기가 넘쳤다.
그렇게 호안끼엠을 구경하다 보니 길거리에서 화가들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노이에 살 적에도 주말마다 보던 건데, 그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관광객이 되고 나니 '나도 한번 그려달라고 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민하던 차에 한 화가와 눈이 마주쳐서 그냥 냅다 의자에 앉아 버렸다.
"Anh vẽ mình đẹp nhé!"(저 예쁘게 그려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화가가 살짝 미소 지은 후 이내 아주 집중하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도화지에 연필로만 현란한 손놀림을 시작했다. 나는 화가를 마주 보고 앉아 있어 내가 어떻게 그려지는지 몰랐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감탄을 했다. 어떤 서양인은 그림을 보더니 "Very good!"이라고 말하며 엄지를 척 들었다. 어떤 베트남인은 한참 동안 그림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 내가 "Bức tranh của mình đẹp không ạ?"(그림 예뻐요?)라고 묻자 "Đẹp lắm!"(진짜 예뻐요!)라고 말했다.
한 10분 정도 지나고 완성된 그림을 보자 감탄이 나왔다. 정말 내 실제 얼굴과 비슷한 느낌이 나면서도 실제보다 예뻤다!
"Anh đúng là họa sĩ. Bức tranh rất đẹp. Cái này đẹp hơn mặt của mình nữa."(진짜 화가시네요. 그림이 정말 예뻐요. 제 얼굴보다 더 예쁜데요.)
내가 이렇게 칭찬하자 내내 진지한 얼굴이던 화가가 수줍게 웃었다.
하노이 여행 첫날 호안끼엠은 평소보다 더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원래 사진을 잘 못 찍는 편인데, 이날은 호안끼엠이 오랜만에 온 나한테 주는 선물이었나, 아경 사진이 멋있게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