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문화원 세종학당 2학기
3년 전과 직장도 그대로, 집도 그대로, 집주인 아주머니와 청소 언니도, 한국문화원 근처 내가 좋아하던 카페도, 내가 가면 항상 미소로 반겨 주던 집 근처 식당 아주머니도 그대로였다. 문화원 직원들도 2년 전에 새로 오신 운영요원 번 선생님과 문화원장님을 제외하고 변함없었다. 문화원으로 다시 출근한 첫날, 문화원 경비 아저씨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다시 여기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하니, 소식 들었다며 잘됐다고 축하해 주셨다. 문화원장님께서도 환영해 주셨다. 환영의 의미로 음식이 고급지고 분위기가 좋은 레스토랑에서 파견교원 선생님과 문화원장님, 번 선생님과 회식을 했다. 3년 전 파견 때는 문화원장님과 회식을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는데(문화원 돈으로 맛있고 비싼 음식을 못 먹어서...), 이번에는 거의 오자마자 회식을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10월 중순 갑자기 추워진 한국 날씨 때문에 감기 몸살에 걸린 채로 베트남에 입국했는데 오자마자 수업하랴 장 보러 다니랴 정신없었다. 그나마 예전에 살던 집에 그대로 들어가게 되어, 집 구하러 다닐 시간은 쓰지 않아도 되었다는 게 다행이었다.
특히 베트남에 입국한 그 주 토요일에 문화원과 대사관에서 주관하는 돌담길 행사가 있었는데, 행사 프로그램 중 하나를 담당하게 되어 마음이 더 분주했다. 주베트남 한국대사관은 담벼락을 덕수궁 돌담길처럼 돌담으로 만들었는데, 매년 그곳에서 한국문화행사인 돌담길 행사를 열고 있다. 이번에는 진주시와 협력하여 진주시에서 온 등불로 돌담길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내가 맡은 프로그램은 '전통 단청무늬 오각등 만들기' 행사였는데, 베트남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였다. 만들기 자체는 어렵지 않았고 PPT를 사용할 수 없어 수업 자료도 만들 필요가 없었고 통역하시는 분도 계셔서 내가 준비할 것은 많지 않았지만, 대상이 초등학생이다 보니 수업 진행에 있어 고민이 많았다.
'만들기만 하면 재미없을 텐데, 어떻게 하면 초등학생들이 더 재미있어할까? 애들이 어려워하면 어떡하지?'
그래서 본격적인 행사 시작 전에 퀴즈를 맞힌 학생에게 과자를 주는 이벤트를 잠깐 하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이 한 시간밖에 없는데, 사전에 미리 연습해 보니 등 만들기에 시간이 은근 많이 소요되어 퀴즈를 하지 말까 생각도 했지만, 과자도 사 놨으니 그냥 하기로 했다. 아이들 반응이 꽤 뜨거워서 결과적으로는 퀴즈를 하기를 잘했다.
아이들이 여기저기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정답을 맞힌 한 명에게 과자를 주자 아이들이 초집중 상태가 되어 다음 퀴즈를 기다렸다. 다음 퀴즈는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에는 색이 몇 개 있을까요?", "한국의 전통 옷 이름은?", "김 위에 밥을 올리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재료를 놓고 말아서 먹는 음식 이름은?", "선생님 이름은?"(제일 처음에 자기소개하면서 이름을 말했다)이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문제는 빨리 정답을 말했는데 아무도 한국의 전통 옷인 한복을 알지 못했다. 그래도 한복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번 기회에 한복을 알릴 수 있었다.
본격적인 행사를 시작하면서 먼저 단청무늬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여기까지 말하고 살짝 뜸을 들였다. 당연히 아이들이 다 조용히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앞의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어서 그 아이에게 마이크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우리나라 전통문화나 건축미술 분야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사전에 찾아본 정보에 의하면 건물의 단청무늬는 미적인 목적과 비바람으로부터 나무 건축물을 보호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하지만 용기를 내서 대답한 것도, 대답 내용도 기특해서 거짓말로 그것도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하며 아까 '한복'의 퀴즈 상품으로 주지 못한 과자를 선물로 줬다.
설명은 간단하게 하고 만들기를 시작했다. 그냥 단청무늬 도안에 여러 색깔로 색칠한 후에 그것을 이어 붙이면 되는 간단한 만들기였는데, 도안이 많아서 예상대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나와 통역사 분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도와줬는데, 어느 순간 주위를 돌아보니 문화원 직원분들을 포함한 다른 어른들도 와서 아이들을 도와줬다. 내가 예쁘게 색칠한 도안을 들고 아이에게 어떠냐고 하면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엄지 척을 보여 줬다.
그렇게 정신없이 아이들을 도와 색칠하다 보니, 어느덧 주어진 시간이 거의 다 되고 있었다. 그래서 아직 다 못 만든 아이들이 있었지만 빨리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많이 완성하지 못할 것 같다는 우려와 달리 꽤 많이 완성작이 나왔다. 행사가 끝나고 단체 사진을 찍을 때 아이들이 내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들고 나에게 착 달라붙어서 귀여웠다. 행사가 끝나고 이제 돌담길을 돌아다니며 다른 부스들을 구경하는데, 바로 옆에서 아까 오각등을 만들던 학생 무리가 줄지어서 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나를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데 한 아이가 튀어나와 나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갔다.
그리고 또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어떤 베트남 대학생(아마도) 두 명이 나한테 인터뷰 요청을 했다. 너무 주변이 시끄러워서 처음에 잘 못 들었는데, 아마도 학교 방송 동아리 혹은 코리아넷 명예기자단(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발하는 한국문화 홍보 인플루언서. 매달 정부 대표 다국어 포털에 한국 관련 뉴스를 제공한다)인 듯했다. 처음에 나에게 영어로 질문했는데, 본인들도 영어를 잘 못하는지 어려워했다. 내가 그냥 베트남어로 말하라고 하니 표정이 밝아졌다. 인터뷰라고 해서 길게 이야기할까 봐 살짝 걱정했는데, 질문 하나만 대답하면 되는 거였다.
저녁이 되자 본격적인 돌담길 행사 개막식이 열렸다. 이번 행사에는 진주시와 국기원에서 와서 다양한 공연을 보여 줬다. 진주시에서 오신 분들이 보여 준 전통 춤·음악 공연도 좋았는데, 국기원에서 보여 준 퍼포먼스는 정말 서커스나 다름없었다. 연속 발차기, 절도 있는 춤 등 다른 퍼포먼스도 훌륭했는데, 특히 사람 키의 두세 배는 되는 위치의 송판을 날아올라서 계속 계속 격파할 때 정말 입이 떡 벌어졌다. 내 주변에 있는 베트남 사람들도 그걸 보면서 계속 감탄했다. 한국어로 "대박"이라고 말하며 박수 치는 베트남 사람도 있었다.
국기원 공연 후에는 베트남의 인기 가수 부이 꽁 남의 공연이 있었는데, 부이 꽁 남 공연이 시작한다는 안내를 하자마자 사방에 있던 베트남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아예 처음부터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고 아까 낮에 오각등 만들기 행사를 할 때부터 무대 앞을 지키던 팬들도 많았다. 정말 인기 많은 가수인가 보다. 나도 보고는 싶었지만 도저히 그 공연까지 보고 갈 체력도 없고 계속 서서 공연을 보느라 다리도 아파서 그냥 집으로 왔다.
대사관 돌담길을 수놓았던 초롱등은 모두 행사가 끝난 후 우리 한국문화원으로 왔다. 11월 3일부터 12월 26일까지 진주시 초롱등 전시 행사를 하기 때문이다. 대문부터 본관 갤러리까지 등으로 꾸며졌다. 솔직히 정식 행사 오픈 전에는 너무 등이 많고 색깔도 알록달록해서 '이게 정말 예쁜 건가' 싶었는데, 준비가 끝나고 불을 밝히니 정말 예뻤다. 지나가는 베트남 사람들도 정문 앞에서 여러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을 찍고, 초롱등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여행객인 서양인들도 관심 있게 보다가 갔다. 홍보 효과는 톡톡히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