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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ma Jul 07. 2023

동화_바다색 만년필

아이는 새빨간 망토를 휘휘 두르고는 옷깃을 잘 여몄다. 오늘은 좋은 일이 생길 거야.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도 보지 못한 그 미소는 곧 봄날의 바람에 실려 훨훨 날아갔다. 아이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뭔가 행복한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이는 대문을 나서자마자 가만히 서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발가락을 꼼지락꼼지락. 온몸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망토 안에 두 팔을 고이 숨기고 아이는 기분 좋게 학교로 향했다.


아이는 학교에 가는 이 시간을 사랑했다. 대부분의 학급친구들은 늦장을 부리다가 허겁지겁 집을 나와 지각을 면하려고 서둘러 뛰어오곤 했지만 아이는 달랐다. 누가 깨워주지 않아도 혼자 일어나 준비하고, 혼자 척척 준비를 마치고 학교로 향했다. 아이는 서둘러 나오는 만큼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감상할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친구를 사귀기 어려웠던 아이는 세상의 풍경과 친구를 맺는 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예쁜 구름을 보느라 고개를 쳐들고 걷다가 옆 반 선생님과 쿵 하고 부딪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담장 위로 흐드러지게 핀 장미꽃을 보며 걷겠다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다. 누군가가 놓쳐버린 풍선 하나가 바람에 실려 날아가는 것을 본 날에는 정신없이 풍선을 좇다가 지각을 하고 만 적도 있었다. 제일 좋아하는 미술 시간에 지각한 그날만큼은 다시는 한눈을 팔지 않고 곧바로 학교로 오겠다는 다짐을 수백 번이나 했다. 그리고 오늘... 


아스팔트 도로 사이로 삐죽 고개를 내민 들꽃이 바람에 몸을 맡기며 하늘하늘 춤을 추고 있었다. 자꾸 자기를 보고 가라며 인사하는 듯했다. 아이는 잠시 쪼그려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그동안엔 왜 못 봤지? 꽃은 아이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더욱 크게 하늘거렸다. 그래 나도 반가워. 아이는 꽃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학교로 향하려는 그때, 발끝에 뭔가 밟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깡총 뛰어올랐다. 까만 만년필 하나가 땅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채 아이는 만년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냥 바라만 봐도 좋아 보이는, 누가 봐도 탐이 날 만 한 그런 만년필이었다. 아이는 마음속으로 셈을 해 보았다. 지금 여기서 그냥 가면 지각은 면할 수 있을 텐데. 마을 사무소에 들렀다 가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10분은 늦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렇게 서서 고민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이는 생각을 멈췄다. 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만년필을 들고 냅다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가슴이 답답해질 때쯤 마을 사무소에 도착했다. 아이는 만년필을 들어 보이며 허겁지겁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얘기를 듣던 직원 아저씨는 살며시 웃더니, 소중한 만년필이구나.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는걸, 이건 이제 네 거야. 하며 다시 쥐어주었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두 손으로 만년필을 감싸 쥐고는 마을 사무소에서 걸어 나왔다. 넋이 나간 채 타박타박 학교까지 걸어가 보니 제일 좋아하는 1교시 미술시간은 이미 끝난 뒤였다. 


선생님께 혼난 것도 속이 상하는데, 미술 시간까지 놓치다니! 아이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집에 와서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엄마에게 핀잔을 들었다. 아이는 침울한 마음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에 붙어있는 별을 보며 마음을 달래 봤지만 오늘은 별들도 별 도움이 되지가 않았다. 어차피 잠을 자기는 글렀어. 그림이나 좀 그려봐야겠다. 아이는 벌떡 일어나 필통 안에 넣어둔 만년필을 고이 꺼내보았다. 마치 보물을 만지듯 그렇게 조심스럽게 들고는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스케치북을 펴서 선을 하나 그어보았다. 짙고 푸른, 깊은 바다색의 선이었다. 아이는 색깔이 참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그려야겠다. 아이는 스케치북으로 쏟아질 듯이 몸을 웅크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갖고 싶었던 강아지를 그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귀에 졸린 듯 나른한 눈망울을 가진 강아지였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그림을 끝낸 아이는 한결 홀가분한 기분이 되었다. 행복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는 아저씨의 말이 이런 것이었을까. 아이는 왠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늘밤 꿈에 이 강아지만 나와 준다면 참 좋을 텐데! 아이는 잠을 자려고 스케치북을 닫았다. 그때였다. 등 뒤 침대 쪽에서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났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그림을 그리다가 잠이 든 것일까? 아이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스케치북을 다시 펴 보았다. 몇 시간을 들여 그린 강아지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촙촙촙촙. 강아지 걷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아이의 왼쪽 소매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아이는 왼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까 그린 강아지가 혀를 내밀고 웃고 있었다. 짙고 푸른, 깊은 바다색의 강아지였다.


아이는 뛸 듯이 기뻤다.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강아지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힘껏 안아주었다. 강아지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아이의 턱을 핥아주었다. 아이는 그날 밤 강아지의 체온에 의지해 다디단 잠을 잤다.  


아침이 되자 아이는 기분 좋게 잠에서 깨어나 강아지에게로 손을 뻗었다. 보드라운 강아지가 손에 닿지 않았다. 눈을 떠 살펴보았다. 강아지가 보이지 않아! 벌떡 일어난 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대에는 덩그러니 아이 혼자뿐이었다. 아이는 책상에 올려둔 스케치북을 열었다. 어제의 그 바다색 강아지가 스케치북 안에서 졸린 눈을 하고 앉아 있었다. 스케치북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지만 강아지는 하얀 스케치북 안에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다시는 느낄 수 없는 강아지의 체온을 찾으며 아이는 하염없이 스케치북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조금 울었다.


하루 종일 의기소침한 상태로 학교를 다녀와 집에서도 시무룩하게 시간을 보낸 아이는 저녁이 되자 조바심이 났다. 그래서 저녁을 대충 먹고는 방으로 뛰어 들어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작고 귀여운 새 한 마리를 그렸다. 아이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스케치북을 닫았다. 그러자 머리 위에서 파닥파닥 날갯짓을 하는 소리가 났다. 아이는 슬그머니 웃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바다색의 작고 귀여운 새 한 마리가 아이를 내려다보며 인사하고 있었다. 만년필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아이는 그날 머리맡에 누운 새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도 더 이상 새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매일 밤 친구를 그려냈다. 어느 날 밤엔 작은 사슴을, 어느 날 밤엔 귀가 큰 토끼를. 매일매일이 행복한 밤이었다. 펭귄 두 마리를 그린 날에는 침대가 좁아 방바닥에 내려와 잠을 잤고, 고양이를 그린 날에는 까칠까칠한 혀로 핥아대는 바람에 잠이 드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아이는 날마다 행복했고, 날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 날 뒷자리에 앉은 학급친구가 아이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넌 항상 웃는 게 좋아. 그리고 그렇게 웃을 수 있다니 참 부럽다. 아이는 무어라 대꾸를 하고 싶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난 그림을 그려. 그림을 그리면 마음이 편해져... 뒷자리 친구는 슬픈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구나.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었다. 아이는 약간 미안하고 슬픈 마음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날 밤 아이는 문득 첫날의 강아지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그래서 밤이 되자 책상에 앉아 첫 날 만났던 강아지를 그렸다. 스케치북을 닫는 순간 뒤에서 나는 강아지의 발소리에, 아이는 눈물이 날듯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네가 나의 마음을 반짝반짝 빛나게 해 주는구나. 아이는 그 어느 날보다도 더 깊고 단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늦잠이라니. 아이는 헐레벌떡 준비를 마치고 학교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간신히 지각을 면한 아이는 첫날의 강아지를 그리는 날에는 앞으로 조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필통을 꺼냈다. 필통이 열려 있었다. 어? 이상하네? 아이는 필통에서 만년필을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이는 가방 속을 들여다보고 답답한 마음에 가방을 거꾸로 들어 탈탈 털어봤지만 만년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는 소리를 내어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간신히 하루를 보냈다.


아이는 등굣길을 거꾸로 거슬러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꼼꼼하게 길을 살폈다. 어딘가에 떨어졌을지도 모를 만년필을 찾아 한 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점점 눈이 아파왔다. 너무 집중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울음을 참느라 그런 것인지, 아이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아이는 자신의 뒷자리에 앉은 친구가 책가방을 멘 채 저 멀리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스팔트 사이로 삐죽 머리를 내민 들꽃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뛸 듯이 깜짝 놀랐다. 친구가 들여다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만년필이었다. 짙은 바다색의, 웃음을, 보드라움을, 단잠을, 행복을 주는 만년필.


친구는 쪼그려 앉은 채로 아이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네 거야? 아이는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친구는 말했다. 너 그림 그린다며. 너랑 잘 어울리는 거 같아. 너 가질래? 아이는 친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런 눈동자라면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 줍는 사람이 임자래. 

아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 총총 뛰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이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마을 사무소 아저씨로부터 나에게로, 그리고 반 친구에게로, 그렇게 마을 사람 모두가 조금씩 조금씩 더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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