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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ema Aug 28. 2023

동화_마지막 인사

“오늘도 말을 못 했습니다.” 

손님 2호가 옷장 문을 열고나오며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둥근 아치를 가진 나무 옷장을 빠져나오는 손님 2호의 어깨가, 마치 옷장의 아치처럼 둥글게 축 쳐졌다. 상심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손님 2호는 이 비밀의 공간이 열린 이후 제일 많이 방문한 손님이었다. 아버지와의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했다는 말로 시작된 그의 얘기는 아주 어릴 적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고개를 끄덕였고, 때로는 미소를 지었고, 때로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하여 그를 두 번째 손님으로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게 벌써 수년이나 지난 터였다. 그는 아직 아버지께 제대로 된 인사를 드리지 못했다.


내가 이 마법의 옷장을 받게 된 것은 형의 임종을 지켜보는 자리에서였다. 그는 여동생들에게는 집과 돈과 보석을, 그리고 나에게는 창고 저 안에 박혀 있던 나무 옷장을 남겼다.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 오랜 기간 동안 엄마아빠 노릇을 해온 형에게 크게 화를 냈다. 쓰레기로 내놓아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거라고 했던가, 내가 형한테 그거밖에 안 되는 존재냐고 묻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질문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분노를 쏟아냈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못한 채……. 형은 아픈 몸보다 내 말에 더 큰 고통을 느끼는 듯 보였다. 그 고통 속에서 형은 무언가 할 말이 있다며 가까이 다가오라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동생들도 그런 나를 탓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어이가 없었으리라. 나는 그렇게 형을 떠나보냈다. 


이 옷장에 마법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후의 일이었다. 나는 차마 쓰레기로 버리지도 못하고, 이사를 갈 때마다 이고 지고 다녔다.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옷장이지만 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고 쳐다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형과의 추억이 서려 있는 물건이었기에 함부로 하지도 못했다. 어렸을 적 술래잡기를 하면 으레 들어가서 숨곤 했던 그 옷장. 둘이서 함께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킥킥거리며 장난치던 우리만의 장소. 더없이 소중한 추억의 공간이었으니까.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옛날 생각을 하며, 형에게 쏟아낸 못된 말들을 후회하며 옷장 안에 몸을 구겨 넣었다. 형이 하려던 말을 듣고 싶은 마음, 형에게 뱉은 말을 모조리 쓸어 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까무룩 잠이 드는가 싶더니… 눈에서 눈물이 났다. 어, 너무 감상에 빠져 있었나 보군. 눈을 뜨고 눈물을 닦으니, 형이 침상에 누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들 역시 그때와 똑같은 자리에서 서서 훌쩍이고 있었다. 형은 말했다. 동생들에게는 집과 돈과 보석을, 그리고 나에게는 나무 옷장을 남기겠다고. 그 말을 듣자마자 깨달았다. 나는 과거로 돌아온 거야! 이게 바로 옷장의 비밀이었구나! 그랬던 거였어! 형은 나에게 쓰레기를 남긴 게 아니었어! 그래, 이번에는 제대로 인사를 하자. 그러나 그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형이 유산을 남기겠다고 말한 그 순간이 되자 그 옛날에 느꼈던 분노가 다시금 일었다. 나는 분명히 이 순간을 한 번 살았는데도, 다시 돌아가자 내 마음은 마치 처음이라는 듯 화가 일었다. 나는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그때와 똑같이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 겨우 바꾼 과거는 단 하나, 형이 하려던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나를 만나고 싶으면 옷장으로 와.” 그게 형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어떤 인사도 하지 못했다. 

다시금 눈을 떴다. 캄캄한 옷장 안. 형이 나에게 이 옷장을 남긴 것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렇게 소중한 물건을 나에게 남긴 거였는데 나는 그토록 옹졸하게 굴었다. 형에게 하고 싶은 말도 하나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분노만을 안긴 채 마지막 길을 떠나게 했다니. 


나는 그 이후로도 한두 번 더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이번만은 과거를 바꾸겠다고 다짐하며.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비록 그 순간을 이미 지나왔던 나인데도, 그때로 돌아가면 마치 처음이라도 된다는 듯 마음이 이상하게 반응했다. 분노가 치밀고 화가 나고. 나는 깨달았다. 이 옷장은 과거로 돌아가게 해 주지만 그때 느끼는 감정까지 없애주지는 못한다는 걸. 그러니 과거로 돌아갈 때마다 나는 형에게 화를 낼 것이고, 상처를 줄 것이고, 평생 후회될 말을 쏟아낼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처절하게 실패하고 쓰라린 마음으로 옷장을 나왔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옷장에 들어가지 않았다.


손님 2호는 병환에 계신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동네 이발사 아저씨다. 그분의 속내를 듣게 된 건 머리를 깎으러 간 어느 날, 눈이 벌겋게 부어오른 아저씨를 보고 내가 너무 놀란 티를 낸 탓이었다. 아저씨는 다 큰 어른이 이렇게 우는 것이 몹쓸 일이라는 듯 자꾸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에게 자신의 사연을 얘기해 주었다.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아버지를 돌보던 아저씨는 잠을 몰아내려고 커피를 사 온 그 순간, 의사와 간호사가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아저씨는 놀라 커피를 떨어트렸고, 병원에 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커피를 닦을 휴지를 찾던 차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듣고 보니 나도 눈물이 났다. 얼마나 허망했을까. 나는 아저씨에게 단단히 입단속을 하는 조건으로 옷장의 힘을 빌려 과거로 돌아가겠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렸다. 그렇게 우리의 계약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아저씨는 그 오랜 시간 동안 과거로 돌아가, 커피를 떨어뜨리고, 또 커피를 닦다가 마지막 순간을 놓치고, 다시 몇 번이나 과거로 돌아가 커피를 떨어뜨리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 가까스로 커피를 밟고 병실 안까지 들어가는 데에 성공했지만, 눈물이 너무 나와 마지막 인사만을 하지 못한 상태로 몇 번이나 고통을 느낀 채 현재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말을 못 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커피를 떨어뜨리고, 그 위를 그냥 걸어서 병실 안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손을 잡는 것까지는 성공했다고 했다. 그러나 눈물이 너무 나와 목이 메어 말이 안 나온다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언제까지 이 고통을 되풀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러나 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그 말만은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아저씨는 옷장 아치처럼 둥근 어깨를 하고 되돌아갔다. 나는 마음이 착잡했다. 과연 그에게 몇 번의 용기가 남아 있을지 궁금했다. 후회 없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떠난 여행 때문에 그는 오히려 고통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마지막 인사를 해야만 끝날 일이었다.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위해 몇 번이고 고통의 순간을 마주하는 아저씨의 뒷모습에,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손님 1호, 바로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옷장으로 들어갔다. 나도 얼마가 걸리든 조금씩 과거를 바꿔보겠다고. 그리하여 마지막 남긴 선물을 감사히 받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도 빼놓지 말자 다짐했다. 얼마가 걸리든 마지막 인사만큼은 제대로 해내고 말 것이다. 나는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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