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루에서 출발하기 전날 밤
━ 오늘 저녁, 삐론*과 삐에레**가 보낸 편지를 한통씩 받았다. 돌연 파리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생각할 새도 없이 이렇게 급히 떠나면 내 좋은 친구들과 재회한다는 설렘을 충분히 맛보지 못하게 되겠지. 삐에레의 편지에는 펠릭스가 최근에 보낸 편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일에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고, 어느 정도는 상황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려고 한다. 정말이지 내 누이***를 포기할 수가 없다. 버림받고 불행해 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생각건대 가장 시급한 일은 펠릭스에게 내 상황을 토로하고 변호사 한 명을 지정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나와 형의 사건을 신경 써줄, 무엇보다 정직한 변호사가 필요하다.
오늘 아침 리즈네 큰아버지와 앙리가 집을 떠났다. 이 헤어짐은 길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고통스러웠다. 앙리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소 냉소적이라 첫 눈에는 호감이 안 가지만, 사실 속내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별을 앞둔 어젯밤, 형은 분명 감성적이 되었을 그 시간,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사람과 어울려 늦은 저녁을 먹었다. 그 전날 밤에 나는 리제뜨와 화해를 한 터라 우리는 밤늦도록 춤을 추었다. 나는 샤를의 아내와, 리제뜨는 앙리와 함께였다.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앙리는 벌써 조금 취한 이 여인 앞에서 줄기차게 음탕하고 추잡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여성을 존중하기에 그들에게 그렇게 음란한 얘기를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이 타락했다고 생각했을지언정 나 역시 얼굴을 붉혔고, 겉으로는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에는, 이 가련한 신중함 때문에 여성들에게 향하는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닳고 닳은 난봉꾼 앙리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여성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나 보다.
*삐론은 들라크루아와 절친했던 친구 중 하나였다. 들라크루아는 우체국장인 그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지정하고 유언 집행을 맡겼다. 삐론은 <르비 데 두 몽드>, <라티스트>, <르비 드 파리>라는 잡지에 실린 들라크루아의 글을 모으는 데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1876년, 《외젠 들라크루아, 그의 인생과 작품》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장-바띠스트 삐에레는 들라크루아의 학창시절 친구로, 시인이자 작가였던 삐에르 바우-로르미앙과 들라크루아의 비서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가 쓴 편지를 보면 많은 부분에서 그와의 친밀함이 드러난다. “1818년에 쓴 편지: 그렇다네, 나는 확신하지. 위대한 우정은 위대한 천재와도 같고, 위대하고도 단단한 우정의 추억은 천재가 쓴 위대한 작품을 읽은 추억과 같다는 것을……. 우리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두 시인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
삐에레는 1854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 1780년에 태어난 누나 앙리에뜨를 의미한다. 들라크루아가 태어났던 1798년에 그녀는 레이몽 드 베르니낙과 결혼했다. 후에 어머니의 재산 분배로 인해 형과 누나사이에 불화가 일어난다. 1798년, 자끄 루이 다비드가 앙리에뜨의 초상화를 아름답게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