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빨강
아이는 눈을 의심했다. 자고 일어나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흑백이 되어 있었다.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모든 게 알록달록 예쁜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것은 흰색, 회색, 검은색의 그러데이션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는 것만 같았다.
눈을 비볐다. 눈을 떴다. 달라지는 게 없다. 다시 한번 눈을 비볐다. 눈을 떴다. 역시 그대로였다. 그때 깨달았다. 아 꿈이구나. 꿈은 대부분 흑백으로 꾼다고들 하지. 그런데 꿈에서 꿈인 걸 알다니 참 신기한데. 자, 이제 다른 꿈으로 바뀌었다가 기분 좋게 일어나면 좋겠다. 오늘 학교 가면 애들한테 이 얘기 꼭 해줘야지. 아이는 다시 깊은 잠에 들기 위해 몸을 뒤척였다. 어젯밤에 읽던 책이 옆구리에 걸려서 책을 빼냈다. 몸을 제대로 들지 않고 책을 빼는 바람에 표지가 약간 찢어졌다. 앗. 안 돼. 책이 찢어지면 안 돼. 선생님한테 혼난단 말이야. 근데 느낌이 너무 생생한데?
앗, 이거, 꿈이 아니잖아.
아이는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몸에서 땀이 났다.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눈을 아무리 비비고 깜빡이며 정신을 차리려고 해 봐도 소용없었다. 세상은 색을 잃었다. 아니, 눈이 색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회색빛 세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기분이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엄마 아빠와 셋이서 먹는 아침식사 자리. 아침마다 마시는 노란색 카모마일은 옅은 회색으로 보였고, 토스트에 얹은 블루베리잼은 까만색이었다. 아이는 맛까지 느끼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조심스레 한 입 먹어보았다. 아 달콤해. 다행이다. 입은 정상이야. 어서 준비하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잘 들리는 걸 보면 귀도 정상. 그러면 그냥 눈만 그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꾹 참고 아무 말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는 뭔가 느낀 듯싶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아이는 엄마 아빠의 배려에 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학교에 가는 길, 매일 보던 개망초의 노란 부분마저 회색으로 보이는 순간, 아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이 눈물이 눈에 담긴 흑백을 깨끗이 씻어주면 좋으련만. 이렇게 실컷 울고 나면 다시 예쁜 꽃망울을 볼 수 있을까. 아이는 눈을 꾹 닫고 엉엉 울다가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고는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살포시 눈을 떠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렇게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벌이 주어진 거지? 아이는 어제저녁 엄마에게 짜증을 냈던 일,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딴생각을 했던 일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골똘히 생각을 하며 학교 가는 길, 한 명 두 명 아이에게 인사하는 친구들이 늘어만 갔다. 아이는 자기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들통날까 싶어 고개도 들지 않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바로 그때였다. 오른쪽 옆에서 뭔가 빨간색이 눈에 띈 것 같았다. 아이는 성급히 고개를 들었다. 반장이 멘 빨간 가방이었다.
어? 색이 보인다! 기뻐하는 것도 잠시, 그것은 그저 빨간색에 국한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아이는 내심 안심이 되었다. 아까 많이 울어서 빨간색을 보게 된 건가, 더 울면 다른 색도 보일까. 아니면 아까 내가 잘못했던 일들을 반성해서 그런가. 아이는 머릿속이 온통 복잡해졌다. 여하튼 아이의 세상에 색깔이 하나 추가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이는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어젯밤 미리 싸 놓은 책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빨간색 펜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공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꿈에 나왔던 작은 토끼였다. 빨간 털에 빨간 눈까지. 모든 것이 새빨간 토끼. 아이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교실을 둘러보았다. 다양한 빨간색이 보일 때마다 아이는 더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빨강이 그렇게 예쁜 색이라는 것을, 왜 이전엔 몰랐을까 하며 기쁜 마음으로 다양한 빨간색을 감상했다.
그날 저녁, 방에서 찾을 수 있는 온갖 빨간색 물건들을 그러모아 책상 위에 놓고 아까 그린 토끼 그림을 구경하고 있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해지는 것 같았다. 너무 빨간색만 쳐다보아서 그런가. 아이는 눈을 비볐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얼어났다. 공책에 그린 토끼가 공책 안에서 문을 두드리는 듯 보였던 것이다. 아이는 얼이 빠진 상태로 잠시 구경하다가 문득 볼펜을 꺼내 빨간색으로 열린 창문을 그려주었다. 토끼가 그 창문을 통해 아이의 세상으로 넘어왔다.
-꺼내줘서 고마워. 얼마나 답답하던지.
-넌 누구야?
-내 이름은 빨강이야.
-예쁜 이름이다. 누가 지어줬어?
-당연히 너지. 날 빨갛게 그려줬잖아.
-지금 빨간색만 볼 수 있어서 그랬어.
-나도 알아.
-네가 안다고? 그럼 왜 이러는지도 알아?
-그건 몰라. 그래도 영원히 그러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 경험으로 하는 얘기니까.
-경험이라니?
-너 같은 애들을 여기저기서 만나봤거든. 너처럼 날 빨리 꺼내준 애는 처음이지만.
아이는 이런 일이 자기 혼자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에 어쩐지 위안이 느껴졌다. 그러나 곧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다른 애들에게 일어난 불행에 안심하다니. 나 참 못됐다.
-그건 불행이 아니야.
-너 마음을 읽은 거야?
-아니, 난 그런 능력은 없어. 그냥 애들한테 다른 애들도 그런 적이 있다고 하면 다들 안심하고는 곧 미안한 표정을 짓더라고. 그래서 물어봤었지. 그랬더니 남의 불행에 안심해서 마음이 안 좋다고 하더라고.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이었으니 너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아서. 어쨌든 이건 불행이 아니야. 오히려 선택받은 거지.
-난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
-지금은 당황한 상태니까.
-그렇구나.
아이는 토끼의 대답을 곰곰이 곱씹어보았다. 뭐든 적응이 되면 조금 덜 힘든 건 사실이니까, 아마도 내일이 되면 또 다른 마음이 느껴질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이런 비밀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잖아! 어쩐지 신나는 마음마저 생겨났다.
-난 이제 잘 건데, 토끼 너도 잘 거야?
-응. 작은 침대를 그려주면 좋겠어.
아이는 토끼에게 작고 포근한 침대와 혹시나 몰라 먹을 수 있는 풀잎을 그려주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 어쩐지 편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공책을 보니 풀잎은 모두 먹어치운 듯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토끼의 그림뿐이었다. 손으로 건드려 봐도 그건 그냥 그림이었다. 아이의 비밀 친구는 다시 그림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이는 무척이나 서운한 느낌이 들었지만, 왠지 밤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흑백의 거리에서 빨간색을 찾으며 기분 좋게 등굣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날 밤, 아이는 조심스레 공책을 열었다. 그동안 답답했다는 듯 토끼가 창문 밖으로 껑충 뛰어나왔다.
-토끼풀을 좀 더 그려줄래. 배가 고파.
아이는 자기 생각이 짧았던 것에 미안함을 느끼며 재빨리 풀을 그려주었다. 토끼는 아삭아삭 귀엽게도 혼자만의 식사를 했다. 토끼가 먹을 때마다 그림이 사라지는 게 너무 신기했다. 아이는 눈치를 봐 가며 남은 공간에 토끼풀을 더 그렸고, 그러면 토끼는 그 풀을 먹었다. 그렇게 공책은 다시 여백이 생겨났다. 토끼가 식사를 마치자 공책에는 침대와 창문만 남아 있게 되었다.
-너무 신기하다.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오늘 저녁은 정말 잘 먹었어. 고마워.
-토끼풀이라면 걱정하지 마, 얼마든 그려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아이와 토끼는 둘 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아이는 자기 눈에 빨간색만 보인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면서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다행인 면도 있었다. 적어도 신호등 빨간불이 보이니까 다칠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귀여운 토끼 친구가 생긴 게 어딘가. 아이는 날마다 마음을 졸이며 눈을 뜨는 날을 지나, 이제는 빨간색만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아빠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원래는 거실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언젠가부터 밥만 먹고는 쪼르르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는 뭔가 몰두하고 있는 것이 걱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가 놓고 간 공책을 들여다본 아빠는 빨간 토끼가 작은 침대 위에서 자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온통 빨간색으로 그려진 그 토끼 옆에는 토끼풀이 수북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빠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날 저녁, 아이가 저녁을 먹자마자 방으로 들어와 공책을 펼치자 토끼가 창문을 통해 튀어나왔다. 토끼풀은 이미 다 먹어버린 지 오래였다. 토끼가 말했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야?
-글쎄. 너랑 놀고 싶어. 그게 다야.
-이제 나 없이 지내는 법도 알아야지.
-너 어디 가?
-아니, 난 아무 데도 안 가.
-그럼 걱정 없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제일 친한 친구가 되자.
-그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토끼풀 좀 더 그려줄래?
오늘따라 차갑게 구는 토끼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토끼에게 잘 보이려는 마음에 다른 날보다 더 많이 토끼풀을 그려주었다. 그러나 토끼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아삭아삭 풀을 씹고는 침대에 올라갔다.
-벌써 자려고?
-응. 조금 피곤하네.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아니 전혀.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오늘 좀 네가 차갑게 느껴져서.
-전혀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너도 어서 자.
-알았어.
아이가 공책을 덮으려는 찰나, 토끼가 아이를 불렀다.
-왜?
-난 항상 네 편이라는 거 잊지 마.
아이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는 공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공책을 펼쳤는데 다른 날과 달리 토끼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는 아침 인사를 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갔다. 그런데 집을 나선 그때였다. 길가에 피어 있는 개망초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색! 노란색이 보여! 빨간색에 이어 노란색까지! 그럼 이렇게 하나씩 색깔이 돌아오려나 봐! 아이는 너무 신나 깡총깡총 뛰며 학교에 갔다. 학교에서도 빨간색과 노란색 색연필을 바꿔가며 필기를 했고, 너무 신난 나머지 토끼 생각은 단 한순간도 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희망이라는 것이 이렇게 기쁜 것이었다니. 아이는 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라고 하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리고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책가방을 벗어던지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 공책을 펼쳤다. 그리고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다른 페이지에 썼던 알록달록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에 하나씩 색이 돌아오는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한꺼번에 돌아오는 거였나 봐! 아이는 너무 기뻐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신이 난 마음으로 빨강 토끼가 그려진 페이지를 펼쳤다. 그런데 토끼가 없었다. 분명히 침대 위에서 자는 모습까지 보았는데, 침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먹다 남은 토끼풀이 엉성하게 늘어져 있다. 아이는 망연자실했다. 토끼가 사라졌어. 그래서 어제 그렇게 나를 쌀쌀맞게 대한 거였어. 내가 더 잘해줬어야 하는데, 고작 토끼풀이나 그려준 것으로 토끼를 아꼈다고 생각하다니. 아이는 자기가 그려놓은 그림을 멍하니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똑똑똑
아빠의 노크 소리. 아빠가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빨간색 토끼 인형이었다. 아빠는 아이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은 마음에 토끼 인형을 사 온 것이었다. 아이는 눈물이 났다. 아빠 품에 안겨서 잠시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토끼의 마지막 인사가 눈에 들어왔다. 토끼풀을 엮어 만든 ‘안녕’이라는 글자. 토끼는 자신이 떠날 때를 알았지만 잠자코 있다가 이렇게 인사만 남기고 간 것이다. 아이는 눈물이 나면서도 왠지 웃음도 났다. 그리고 이렇게 때맞춰 나타난 빨강 토끼 인형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아빠의 마음을 안심시키기 위해 활짝 웃어 보이고는, 공책을 탁 하고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