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ema Nov 28. 2023

동화_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아이는 자기 전 창문을 열고 바람을 기다렸다. 다른 날보다 고요한 밤. 바람이 불어올 것 같지 않아 조금 초조해졌지만 그래도 계속 기다리기로 했다. 늦은 적은 있어도 안 온 날은 없었으니까. 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구름은 없었다. 구름이 있었다면 바람의 방향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을 텐데. 아이는 슬슬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꼬집고 눈을 비벼 잠을 몰아내려는 찰나, 창문이 덜컹, 하고 움직였다.


왔다!


작게 소용돌이치는 바람이 어느새 창문 앞에서 위잉 위잉 소리를 냈다. 그 소용돌이 안에는 누군가 먹은 과자 봉지가, 그리고 이름 모를 나뭇잎 몇 개가 엉켜 떠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입을 뗐다. 오늘 과학 시간에 뒤를 돌아보고 얘기한 것은 뒤에 있는 급우가 지우개를 떨어뜨려 그걸 주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절대로 떠들거나 딴짓을 하던 게 아니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아이를 일으켜 반 친구들 앞에서 다시는 딴짓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세 번이나 복창하게 만들었다. 아이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그 억울함을 풀어줄 것은 오직 바람이었다. 바람아 내 얘기를 들어줘. 내 억울한 마음을 위로해 줘. 바람은 아이의 얘기를 한참 듣더니 위잉 위잉 시계방향으로 돌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마치 고개를 끄덕이는 듯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더니 그대로 하늘로 사라졌다. 땅바닥에는 과자 봉지와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바람은 사라졌다. 아이의 억울한 마음을 데리고. 덕분에 그날 아이는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다음 주 과학시간. 과학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아이의 이름을 불러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지난주에는 선생님이 오해한 거 같다고. 정식으로 사과한다며 아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얘기에 아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제저녁 선생님이 바람을 쏘이러 창문을 열고 따스한 홍차에 설탕을 넣어 호록호록 마시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줌의 바람이 자기를 주변으로 동글동글 원을 그리며 회오리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랬는데 그 순간 자신이 혼낸 아이가 사실은 딴짓을 한 게 아니라 뒷자리 급우를 도와주려던 것이었다는 느낌이 들면서, 왜 아이에게 제대로 묻지도 않고 혼낸 걸까 후회가 들었더란다. 그렇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자마자 회오리바람은 스르르 사라졌다. 아주 온화한 바람이어서 홍차의 온도는 조금도 낮아지지 않았다. 선생님은 내일 수업에 아이에게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홍차를 맛있게 마셨다고 했다.


과학시간이 끝나자 반 친구들이 모두 아이 근처로 모였다. 아이가 사실은 그동안 속상한 일이 있을 때마다 바람에게 얘기했는데, 이렇게 억울함을 풀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설마설마하면서도 제 귀로 들은 얘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과학 선생님은 아주 정확하고 사실만은 전달해 주는 선생님이었기에, 아이들을 속이기 위해 그런 얘기를 지어낼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날부터 반 아이들 모두는 밤이 되면 자기 전 모두 창문에 붙어 바람을 기다렸다. 새봄의 향기를 물씬 풍기는 온화한 바람이 당도하면, 아이들은 속상한 얘기, 마음에 담아두었던 슬픈 얘기, 때로는 억울한 얘기를 바람에게 들려주었다. 마음 착한 회오리바람은 아이들의 얘기를 모두 들어주었고, 그날부터 모든 아이들이 편한 마음으로 단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의 슬픈 마음이, 힘든 마음이, 아픈 마음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작가의 이전글 들라크루아의 일기_182210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