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일
피가로의 결혼*을 보고 들어왔는데, 흠잡을 데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작은 아이처럼 아직도 흥분에 싸여 있다. 내 생각은 어찌나 변화무쌍한지! 한 순간 떠오른 생각이 모든 걸 흐트러트리고, 뒤집고, 앞서했던 결심을 되돌린다……. 내 깊은 곳에 있는 진실한 감정으로 보자면, 나는 나 자신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비치길 원하지 않는다. 그래봤자 무슨 소용인가? 사람들은 온 나라에 영향을 주는 터무니없이 큰 재난보다, 자신에게 닥친 아주 작은 불행을 걱정거리로 삼는다.
━오직 해야 할 일만 하라. 너는 오해했다. 너의 상상력이 너를 속였다.
━음악은 자주 나에게 거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음악을 들을 때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엄청난 열망이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나에게 부족한 건 인내심인 것 같다. 작업을 할 때 내가 아는 사람들의 태도를 나 또한 갖고 있었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결과물을 내는 데에 너무 조급해한다.
━샤를, 삐론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그런 후 이탈리안 극장에 갔다. 거기 있는 여성들이 어찌나 달콤하게 내 마음을 흔들었던지! 그 우아함, 그 표현, 내가 봤지만 절대 소유하지 못할 그 모든 천상의 것들은 나에게 슬픔과 기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시 연주하고 싶다.
━오늘 흐뭇한 마음으로 이탈리아 여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같은 날 밤, 새벽 1시 반
━검은 구름과 격렬한 돌풍 사이로 하늘 위에서 오리온좌가 잠시 빛나는 걸 보고 온 참이다. 처음에는 저렇게 매달려 있는 세계와 비교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생각했다. 그런 다음 정의에 대해, 우정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심장에 새겨진 성스러운 감정에 대해 생각했고, 나는 우주에서 인간과 그의 창조자보다 더욱 위대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생각은 나를 강타했다. 그가 존재하지 않는 게 가능한가? 뭐라고! 단순히 여러 요소가 결합해 만들어낸 우연이 미덕을 창조하고 미지의 장엄함을 반영할 수가 있는 걸까! 만약 우주가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다면, 양심, 후회, 헌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 만약 네가 존재의 모든 힘을 다해 신을, 의무를 창조한 그 신을 믿을 수만 있다면, 네가 가진 우유부단함은 고쳐질 것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나날들을 교란하고 평온하게 흘러갈 그것은 바로 이 삶이라는 것을, 삶에 대한 공포와 안락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것을 고백하라. 이 여정의 끝에서 너를 맞아주는 하늘의 아버지를 볼 수 있다면! 여기까지만 쓰고 자러 가야겠다. 하지만 너무나도 행복한 꿈이었다……
━말을 대상으로 한 습작에서 진척을 보인 것 같다.
*들라크루아는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많이 동경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피가로의 결혼 공연에 마음을 빼앗겨 학수고대했다고 한다. 실제로 1822년 8월 30일, 삐에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지금 상영 중인 피가로의 결혼에서 백작부인 역을 맡은 사람이 누군지 알면 말 좀 해주게. 왜냐하면 맹비엘 부인이 없었거든” 들라크루아의 편지를 모아 출간한 미술 평론가 필립프 뷔르띠는 이렇게 주석을 달았다. “7월 27일부터 9월 14일까지 4번 공연된 피가로의 결혼에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다음과 같다. 알마비바-르바쉐르. 피가로-펠레그리니, 바르톨로-프로페티, 바질리오-드빌, 안토니오-올레따, 백작부인-보니니, 수잔나-날디, 케루비노-씬띠, 마르첼리나-고리아, 바르바리나-블랑지” (들라크루아의 편지 1권 91쪽)
**어린 시절부터 그를 사로잡은 건 사랑에 대한 관심이었다. 이것은 그가 1821년 2월 21일, 삐에레에게 쓴 편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불행해. 나에게는 더 이상 사랑이 없어. 내 행복에는 이 달콤한 고통이 빠져있다네. 헛된 꿈은 나를 온통 흔들고 만족을 주지 않지. 사랑하며 고통받을 때는 그토록 행복했는데! 내 질투까지 찔러대던, 나도 모르는 그런 것이 있었는데, 지금의 담담함은 그저 시체의 삶일 뿐이네.” (들라크루아의 편지, 1권 75쪽)
***(영) 이 여성은 마담 드 꽁쁠랑으로, 기유마르데의 누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