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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빤짝맘 이은영 Feb 12. 2020

#2. 우리가 여행을 시작하기까지.

살아내는 힘이 되었던, 프라하 행 비행기 타는 꿈.

"오빠. 이 도시 정말 맘에 드는데, 딱 하루라니 너무 아쉽다. 우리 꼭 다시 오자."

"그래. 우리 곧 다시 오자. 우리끼리만 며칠동안 구석구석 돌아보자."




2009년 가을, 7년차 직장인이던 때. 출장이라 쓰고 패키지 여행이라 읽는 동유럽 문화 탐방 프로그램에 가게 되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땐 뭐 그런게 있었다. 법인카드 영업의 일환인, heavy user 기업에 대한 카드사 제공 여행 프로그램.

여러 카드사에서 매년 몇명씩 보냈기에 일종의 순번 같은게 있었다. 대부분 지역만 조금씩 다를 뿐 동남아였는데, 하필 내 순번에 이전에 한번도 없었던 동유럽 프로그램이 나와버렸다. 나 조차도 서류를 받아들고 어안이벙벙 했으니까.


동반자 비용을 부담하면 가족 동반도 가능했기에, 남편도 270만원이라는 우리 수준에 대단한 거금을 부담하고 나와 동행했다. 정말 열심히 살아온 우리에게 온 선물 같은 기회니 꼭 같이 가자며.


우리 부부는 삶의 모습이 참 많이 닮아 있다.

우리는 참 치열하게 살았다. 아니, 치열하게 살아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대학 입학금 조차도 부모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장학금이던 과외던 어떻게 해서든지 학비와 용돈을 벌어야 했다. 대학생 배낭여행은 그저 먼 이야기일 뿐이었다. 당장 다음 달, 다음 학기 생존이 불투명한데 여행에 쓸 시간도 돈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둘이 만나서 우린 그래도 대기업 직장인이니 맨주먹으로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해보자며 결혼을 하고, 정말 하루하루 악착같이 살았다. 그 안에서 분명 뿌듯함과 행복도 있었지만, 다시 하라면 못할 아니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날들이었다. 벌어야 했기에 아이들을 먼 곳에 떼어놓고, 주말부모 주말가족 하면서 그렇게 피 땀 눈물(어머 BTS!) 빼며 살았다.

이렇게 살아온 우리에게 해외여행이란, 신혼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결혼 만 5주년이 되었던 2009년 그 시점에. (물론 업무상 해외출장은 각자 있었지만, 그건 정말 업무를 위해 간 것이었으니.)

여름 휴가때도 번듯한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했다. 어떻게든 삶의 기반을 만들어가야 하는 시기였기에.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 살아보겠다고.

그런 우리 앞에 선물처럼 놓여진 동유럽 패키지여행 티켓.

그게 우리 부부의 첫 유럽이었다. 그리고 도착 공항이자 여정의 첫 도시는 프라하였다.




"와! 어머! 세상에!"


유럽의 첫인상은 정말 어메이징 했다. 가을의 프라하, 무슨 말이 더 필요했을까.

그저 발걸음 옮기는 곳 마다 감탄만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도시 프라하. 거기에 남편(평소 호칭은 오빠^^)이 함께 있는데.

게다가 최고의 가이드님이 최고의 코스로만 안내해 주시는데. (훗날 가족여행에서 알게 되었는데, 그 가이드님이 프라하 한인 가이드 협회 회장님이시라고.)

나는 단숨에 프라하의 매력에 빠져버렸다.

패키지 여행이기에 1박2일의 프라하 일정 후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데,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뻔 했다.

"나 정말 여기 더 있고 싶어. 오빠, 우리 언젠가 여기 꼭 다시 오자! 나 카를교 위에서 그 성인 부조 문지르면서 여기 다시 오길 빌었으니까!"

2009년 첫 프라하. 블타바강과 카를교.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곳.


여행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뒤, 우리 부부에게 특히 내게 프라하는 '꼭 다시 갈 도시'가 되었다. 여태 살아온 것 처럼,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주말가족 하면서 열심히 벌면, 그리 멀지 않은 시일 내에 - 어쩌면 다음 해 여름 휴가로라도 - 금방 다시 갈 줄 알았다. 그 해 가을 내 생각으로는.


하지만 삶은 그렇게 계획대로만 무탈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우유 주고 밥만 주면 되었던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주말부모, 주말가족의 문제가 여러 모양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이들에겐 내가 필요했고, 나도 아이들이 필요했다.

나는 많이 아팠다, 몸도 마음도. 너무나 쉼없이 달려온 삶에 지쳤고, 아이들도 일도 내가 원하는 만큼 이루어내지 못하면서, 모든 것이 다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무력감이 찾아왔다. 무엇 하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점점 무너져가는 내 마음을 위해서라도. 일이냐, 가족이냐. (워라밸 이라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겐)


나는 잠깐만 충전하면서 두 아이들 정서를 추스르고, 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추스르고 나서 다시 워킹맘이 되겠다며, 남들은 못가 안달이라던 대기업을 내 발로 뛰쳐나왔다. 조금만 쉬고 다른 직장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그랬는데 남편이 경기도 화성의 연구소로 이동하게 되고, 갑자기 셋째가 찾아오고. 점점 상황이 내 계획과는 전혀 다른, 통제 불가능한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퇴직, 남편의 발령을 따라 아무 연고 없는 시골로 이사, 셋째 출산, 더욱 팍팍해진 경제 상황,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 그리고 퇴근이 없는 전업육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모든 것이 바뀐 내 삶.

결정의 순간에 가족을 잡은 것도 나였고, 가족이 함께 맘 편히 살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감내하겠다며 내손에 꼭 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도 나였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했고 후회하지 않는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워킹맘 주말가족’은 아이와의 단절로 마음이 힘들었다면, ‘전업맘 매일가족’은 몸도 마음도 모든 것이 정말 힘들었다. 왜 내 인생엔 이렇게 피 땀 눈물 빼는 일들의 연속인거니?

 

이들의 피 땀 눈물은 이렇게도 멋지건만. 내껀 왜 이리 슬프냐..


보육 대란이라 할 만큼 어린이집 입소가 치열했던 시기였기에, 중간에 외지에서 이사 온 우리 첫째 둘째는 어린이집에 등록조차 할 수 없었다. (사실, 등록이 된다 해도 보육비 부담도 엄청났을거다. 무상보육 안하던 때니까.) 그렇게 이사 후 고스란히 1년반 동안, 낯선 시골에서 아이 셋과 24시간 붙어 있어야 했다.

도우미도 없는 시골 동네여서 모든 살림을 혼자 감당해야 했고, 설상가상 남편은 무척이나 바빴다. 여름 휴가에도 주말에도 남편은 출근해야만 했다. 평일에도 아이들이 모두 잠든 늦은 밤에나 퇴근했다.


어떤 날은 너무 아프고 힘든데 신생아 막내는 울고 보채고, 정말 딱 한시간만 약 먹고 누워있으면 살 것 같은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부탁할 곳이 없었다.

그 때 살던 아파트 옆집 문짝에 어느 교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공교롭게도 지금 내가 출석하고 있는 교회다.) '혹시 교회 다니는 분이니까, 예수님이 힘든 사람 도우라 하셨으니까, 내가 도와달라 하면 막내 아이 한시간만 봐주시지 않을까? 살려달라고 말해볼까?' 하는 마음에 그 집 초인종 앞에서 서성이기도 했다. (결국 못누르고 돌아왔다.)


정말 힘들면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저 ‘내일은 오늘보다 아이들이 조금은 자랄 테니, 오늘보단 나을 거야. 오늘이 가장 바닥이고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 매일 밤 이런 자기최면을 거는 것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도대체 이 터널의 끝이 있기는 한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막내 출산 이후로 약 3년 동안, 나는 처음 겪는 한계 상황 속에서 산후 우울증에서 비롯된 우울증을 겪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우울증에서 비롯된 화는 고스란히 남편과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때 내가 우울증이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래서 상담이든 약물이든 도움을 받았더라면, 나도 가족들도 조금은 더 편안했을텐데. 그 땐 내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것도 모를만큼, 그렇게 힘든 날을 보냈다.

 



그 때 내가 버티고 살아냈던 힘은 프라하 행 비행기 타는 꿈이었다.


막내 아이를 아기띠로 달고, 첫째 둘째를 세발자전거 태워서 아파트 놀이터에 나가서 벤치에 앉으면 시골 특유의 청량한 공기가 코끝을 휘감았다. 그럴 때면, 몇 해 전 프라하에서 느꼈던 그 가을 공기의 느낌이 떠올랐다. 아, 프라하에 가고 싶다. 눈물 나게 가고 싶다.

우리 동네는 비행기가 참 많이 지나다니는데, 파란 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볼 때면 그걸 타고 훨훨 날아갈 그 날을 꿈꿨다.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공항. 비행기 타고 이곳에 내리는 꿈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2016년 도착 직후 찍은 사진.


그 때 프라하 카를교 위에서 얀 네포무크 성인의 부조를 정성껏 문질렀으니, 나는 꼭 프라하에 다시 가게 될거야. 막내가 유치원에 갈 만큼 크면, 우리 가족 모두 프라하로 훨훨 날아갈거야. 거기서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올거야.
카를교에서 블타바 강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프라하성에서 빨간 지붕으로 가득찬 도시를 내려다보며 커피를 마실거야. 정말 맛있었던 체코 요리도 실컷 먹어야지.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프라하 구시가지를 구석구석 걸어다닐거야.

분명 프라하는 내게 ‘그 동안 힘들었지? 정말 수고했어. 잘 했어.’라고 토닥여줄거야.
프라하니까, 내게 최고로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니까, 이렇게 간절히 꿈꾸는 곳이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버티자. 살아내자.
하루 하루를 살아내면 그게 모여 일주일이 될거고, 한달이 될거고, 일년이 될거고, 몇 년이 될거야. 그러고 나면 내게 아기띠로 대롱대롱 매달린 이 아이도 무럭무럭 자라겠지.




2016년 3월.

3학년, 2학년, 7살 유치원생 세 아이를 데리고.

우리 가족은 드디어 7년간 기다린 프라하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나를 버텨내게 해 준 그 꿈이 현실이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도 꿈 같았고, 돌아와서는 더더욱 꿈 같았던 그 행복했던 우리의 프라하 여행은.

이렇게 오랜 기다림 끝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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