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업무의 핵심 담당자이자 결정권자는 나예요
"혹시 이번에 저희 사장님 미국 방문 시에 만날 수 있는
본사의 미국인은 없을까요?"
지어낸 것 같지만, 실제로 은근히 많이 듣는 질문이다. 아무래도 한국 기업, 아시아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주로 담당하다 보니, 파트너사 고위층이 구글과 같은 미국 회사와 만나는 자리엔 '본사', 그것도 미국인이 있어야 제대로 높은 사람과 만났다는 기분을 느끼는 것 같다.
'이번에 우리 전무님이 실리콘밸리로 출장 가시는데, 가신 김에 구글 '본사' 분들 만날 수 있게, 미팅 어레인지 해주세요.'
'구글 '본사'에서 정하실 수 있겠죠? '본사'하고 이야기하게 해 주세요.'
이럴 때마다 '그 업무의 결정권자는 저와 저희 APAC 임원이고, US 오피스에서는 관련해서 이야기 나눌만한 담당 직원이 없는데요...'라는 이야기로 대응을 하면, 그래도 미국까지 갔는데, 구글 본사 누구와 담판을 짓고 싶다는 의견이 돌아온다.
삼성에 있었을 때를 떠올리면, 사실 이들의 마음은 백분 이해되지만, 구글의 입장으로 보면, 또 난처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그들이 생각하는 '본사'가 구글에서의 '본사'와는 조금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본사 주재원 어디 갔어?"
삼성에서 해외영업 마케팅 업무를 '본사'에서 담당하면서, 지사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협업은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었다. 각 지역의 Head인 지법인장은 대개 한국 본사에서 임명받아 파견된 한국인 임원급이고, 그 아래로 현지에서 채용된 현지인 임원급과 간부 및 실무 직원이 있는 가운데, 간부급의 또 다른 한국 본사 파견 한국인 직원이 있는 구조가 일반적이었다. (이는, 현재 내가 구글에서 담당하는 각종 한국 기업들의 해외지사 구조와도 대동소이하다.) 다시 말해, 현채인(현지 채용 인력)과 본사 주재원으로 지법인 안에서 신분이 나뉘는 것이다. 본사에서 사장단 혹은 임원급 주관의 주요 글로벌 회의가 있으면, 대개 각 지법인의 한국인 지법인장과 한국인 주재원이 동석한다. 한국기업에서 한국어 능력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고, 한국 문화를 보다 잘 이해하는 구성원이 먼저 본사의 지침을 듣고 이를 지사에 공유하는 방식이 더 효율적이기에 이렇게 진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본사와의 Top-down 식 수직 구조를 가진 한국 기업에서는 이 방식이 실제로 효율적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각 지법인의 업무는 현지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지만, 본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 주재원의 지위는 해당 조직 내의 계급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주재원이 각 지사의 중요한 결정을 본사에 보고하면, 본사가 이를 승인하는 방식의 의사 결정 구조를 갖게 되다 보니, '본사' 출신은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현채인들에겐 자신과는 아예 커리어가 다른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던 것 같다. 더욱이 각 지역의 현채인이 한국의 본사로 발령 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 이런 문화에서 '본사'가 '주요 결정권자' 혹은 '핵심부서'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Sam, 한국의 A사가 나한테 연락이 와서 만나자는데,
내가 만나도 괜찮을지 네가 결정해 줘."
미국 마운틴뷰 오피스(구글에서는 '본사'라는 말을 잘 쓰지 않고, 대신 해당 사무실이 있는 지역 오피스로 부른다.)의 임원급인 N이 내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인즉슨, 한국 파트너사의 임원단이 미국 IT기업 탐방을 할 겸 몇몇 주요 기업의 '본사'에 미팅이 가능한 지 의견을 타진했는데, 안건을 보니 자신보다는 내가 그 미팅에 화상회의로라도 들어가는 게 맞는 것 같아, 자신이 들어가도 괜찮을지 판단해서 알려달라는 것이다. 한국기업의 정서로는 APAC 담당자인 나보다 미국 본사의 직원들이 더 많은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기에, A사의 요청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긴 했지만, 이는 구글의 시각으로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한국 기업에는 보통 본사에 각 지역별 담당인력이 있지만, 구글은 해당 업무에 대응되는 인력이 대체로 본사가 아닌 각 지역에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글은 일반적인 한국 기업보다 수평적인 조직을 갖고 있다. 그만큼 각 업무의 전문성을 가진 이의 의견을 중요시하여 그들의 결정을 지지하고 또 그에 대해 책임도 지게 하는 문화를 가졌다. 또한 각 업무별로 결정권을 가진 Head급이 반드시 마운틴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싱가포르에 있기도, 서울에 있기도, 혹은 또 다른 어떤 곳에 있기도 하다. 한 예로, 내가 협업하는 특정 개발 관련 업무의 글로벌 헤드는 도쿄 오피스에 있어서, 미국 비즈니스의 최종 결정도 도쿄에서 한다. 한편, 내가 하는 일은 경중에 따라 한국 Lead인 내가 결정하거나, 싱가포르 오피스에 있는 Head가 내 의견을 받아 결정한다. 물론 미국 '본사'에 CEO를 비롯 President급의 높은 임원들이 많기에, 그곳에서 큰 규모의 의사 결정이 되기도 하지만, 대개 각 분야별 비즈니스 Head 선에서 정리가 된다. 그리고 각 해당 업무의 전문가에게 권한과 그만큼의 책임을 주는 구조이기에, 나에게 판단을 하도록 일임하는 일이 많다. 그래서 보통 파트너사들이 본사에 가서 직접 임원을 만나 듣게 될 이야기는 내 의견을 그대로 다시 전달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다시 말해, 내 의견이 바로 '본사'의 의견이 되는 것이고, 그만큼 내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에 부응하여, 그 일을 가장 잘 알고 잘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그들이 찾는 '본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저, 다음 주에 마운틴뷰로 리로케이션(전배)합니다."
"이 포지션은 서울이나 싱가포르중에서 원하는 곳에서 일하시면 될 것 같아요."
한국기업에서는 흔하지 않았던 경험 중에 하나가 바로 오피스 로케이션의 개념이다. 위와 같이, 소위, '지사'의 '현채인'이 '본사'로 가는 일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업무 중에도 자기가 원하는 오피스를 스스로 정해도 되는 롤도 상당히 있다. 우선 '현채인', '본사 주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이 각 업무 별로 채용이 되고, 그 역할에 맞는 곳에서 일하다가, 다른 업무로 지원해서 그 해당 지역으로 가는 일이 자연스러운 환경이어서 가능한 이야기이다. 업무의 결정권을 가진 Head가 있는 곳이 '본사'라고 한다면, 내가 현재 하는 신사업개발 업무도 분야별로 약 5명의 Head가 있는데, 5명이 전부 각각 싱가포르, 마운틴뷰, 뉴욕, 샌프란시스코, 스위스 취리히에 따로 있다. 그런 내게 '본사'는 과연 어디일까?
얼마 전 미국 '본사'를 계속 찾는다는 파트너사의 이야기를 지나가듯 팀 Head에게 말을 전하자, 그녀의 한마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 일의 전문가이자 책임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너야. 난 널 믿어."
이렇듯, 내가 이 업무와 이 파트너에 대한 최고 전문가라는 확신이 있다면, 나의 판단으로 비즈니스를 만들어간다는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이다. 현장을 제일 잘 아는 '지사'와 그 판단과 결정을 주도하는 '본사'. 내가 바로 그 '본사'와 '지사'의 역할을 다 한다고 생각하면서.
표제 사진 출처: pixabay.com/illustrations/earth-globalisation-network-3866609/
사진 1 출처 : AFP PHOTO / John MACDOUGALL: foreignpolicy.com/2017/07/03/thousands-of-protesters-prepare-to-jeer-trump-putin-and-erdogan-at-g-20-summ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