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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작가 S May 06. 2020

거창한 이유가 없으면 어때?

Just do it!

"지금 왜 유학을 가려는 거야?", "지금 왜 이직하려는 거야?"

주변의 질문을 받고는 나는 잠시 머뭇하며,

"어렸을 때부터 꿈꿔왔던... 글로벌 리더가 되어... 세계 평화에 이바지..."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생각해 보면 그랬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원대한 목표와 꿈을 갖고 그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매진한 사람들 이야기들이 대부분인 것 같고, '원래 성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 성공하고 위대한 업적을 이루는구나'라는 결론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쩐지 나와는 DNA부터 다른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아서, 나 자신을 돌아보며 조금 주눅이 들었다.

난 사실 새로운 변화를 꿈꾸는 것은 '왠지 이대로 멈춰 있는 것은 미래가 불안해서', '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어서', '주변에서 많이들 도전하니까', '남들이 이게 좋다고 하니까', '외국에서 지내고 싶어서', '경력을 더 화려하게 꾸미고 싶어서' 등의 조금은 민망하고 소소한 이유가 더 컸다.

"겨우 그 이유 때문에 그런 걸 해보려는 거야? 그런 이유면, 그런 거 다 해봤자 쓸 데 없어. 안 해봐도 다 안다. ROI(투자 대비 효용)도 안 나올 거야. 할 필요 없어."

유학을 준비할 때, 처음엔 그저 단순히 MBA란 타이틀이 갖고 싶어서 준비를 시작했다. 주변에 다녀온 분들이 있어서, 부러운 마음에 막연하게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엔 MBA가 희소성이 없어서 잘 알아주지도 않고 투자한 만큼 연봉이 오르지도 않으니까, 돈 낭비,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는 식의 조언이나 글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난 그 경험을 하고 싶었다.

"안 좋든 좋든 내가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판단할래"

그러나 도전하기로 결심했다고 그대로 동화책의 해피엔딩 보듯 유학으로 직행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내 앞에는 GMAT과 TOEFL이라는 시험과 나를 왜 뽑아야 하는지 설득하기 위한 에세이 준비가 기다리고 있었고, 주변인들의 추천서와 인터뷰가 이어지는 지난한 과정이 줄을 서 있었다. 누가 나를 떠밀며, '유학 안 가면 인생 끝나는 거야!'라고 압박을 주는 것도 아닌 만큼 순전히 내 의지에 달린 과정인데, 사실 회사를 다니면서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려 녹초가 된 뒤의 밤과 짧은 주말을 쪼개서 이를 준비하는 건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아쉬운 대로 "20XX 년 해외 유명 MBA 유학 진지하게 고려(했었다가 중간에 포기)"라고 이력서에 넣을 건가?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일단 시작만이라도 해보자며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GMAT 학원에 등록해서, 시험만 한번 봐 보자.' '점수가 XXX점 이상이 나올 때까지만 눈 딱 감고 달려 보자.'라며 바로 눈 앞에 닥친 과제만 해보고 나서 포기할지 정하자는 마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미션을 진행했다.

'XXX점입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점수가 확인 가능한 이 GMAT 시험의 묘미는 시험을 다 치르고 마지막에 점수를 확인하는 그 시간이었다. 항상 시험 끝난 날은 비련의 주인공처럼 그 거리에서 제일 우울한 아우라를 풍기며 집에 돌아가곤 했던 내게, 4번 만에 드디어 만나게 된, 간절히 원했던 그 점수는 그간의 나의 우울했던 수많은 주말들을 보상해주는 포상 같았다. 그리고 원하는 점수를 받자 게임에서 한 판을 깨고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것처럼 다음 미션을 열게 되었다. 이렇듯 일단 시작하니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는 지원할 학교를 추리고 에세이를 쓰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점수가 없었으면, '점수도 없는데 무슨 지원이야.' 하면서 그냥 포기했겠지.

나를 소개하고, 나를 뽑아달라는 썰을 푸는 에세이는 방망이 깎는 노인의 심정으로 깎고 또 깎아 나의 삶, 꿈, 의지를 짧은 글 안에 다 녹여야 하는 과정이었다. 살면서 나에 대해 이렇게 고찰해본 적이 있었던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외국문화에 관심이 많았구나. IT회사에서 해외 교류하는 업무도 했으니, 학교에 가서 다른 백그라운드 가진 애들하고 교류 많이 하고, 졸업한 뒤엔 글로벌 시장에서 IT와 문화 키워드 관련한 일을 하면 재미있겠다.'

이 과정을 통해, 내 과거를 이해하게 되었고, 내 미래를 보다 구체적으로 꿈꾸게 되었으며, 내가 지금 도전하려는 곳에서 무엇을 경험하고 싶고 배울 수 있을지 더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내가 일단 도전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내 삶의 목표가 하나 세워지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도전 과제들을 하나씩 도장깨기 하던 하루하루를 보내고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파리 근교의 어느 소도시에서 바게트를 입에 문 채 등교하고 있었다. 만약 처음에 유학을 결심한 뒤에, 그저 마음에 품은 채 고민만 하며 아무것도 저지르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그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았을까.

'할까 말까 고민되면 해라.'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이것 저것 다 경험해보면 좋겠지."라는 생각으로 부딪혀 오다 보니, 후회는 별로 안 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 당시에는 후회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돌이켜 볼 때 그렇게 후회스러운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결과적으로 그래도 꽤 괜찮은 선택을 해 왔나 보다. 그냥 일단 하고 싶으면 어떤 이유든 해 보고 나니, 내가 아는 세상은 점점 넓어지고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점점 많아졌던 것이다. 그래서 특별하지 않다고, 즉흥적이라고, 세속적이라고, 또는 한심해 보인다고 주눅 들거나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택의 이유는 도전한 다음에 깨닫기도 하는 거니까. 도전을 시작하고 나면 그전에 안보이던 길이 보일 테니, 일단 뭐든 저질러 보면 내일의 나는 분명 지금의 나와는 달라져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표제 사진 출처: pixabay.com/illustrations/board-font-do-make-act-action-4284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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