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투명인간
집 나간 아빠가, 내 눈에는 계속 보인다.
세상 알 거 다 아는, 한국 나이 3살의 한 소녀는, 오늘도 굉장히 혼란스럽다.
아빠가 분명히 아침에 일하러 간다고 했는데, 현관이 아니라 골방으로 들어간 게 아닌가. 게다가 옷은 어제 잘 때 그 옷 그대로. 아무래도 의심스럽다.
'역시, 딱 걸렸어!'
회사 일하러 간다더니 화장실에 앉아있네. 근데 자꾸 왜 숨는 거야?
뒤통수가 뜨겁다.
딸아이의 뜨거운 의심의 눈초리가 골방으로 출근하는 내 뒤통수에 꽂힌다.
원래 사무실로 출근할 때는 하루 한번 있을 이별의 순간이, 이제는 하루에 십 수 번이 있는 듯하다. 소설 어린 왕자의 별은 정말 작아서, 석양을 보고 싶으면 의자만 조금씩 옮겨가며 하루에 수십 번을 볼 수도 있다고 했는데, 우리 집은 출근 세리머니를 수십 번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별처럼 작아서일까...
이 작은 별에서 재택근무 붙박이가 된 나를 포함해, 프리랜서 번역가인 아내도, 무직자인 딸아이도 모두 작은 집에 24시간 내내 함께 부대끼며 지내고 있다.
지이잉- 지이잉-
아, 또 아침이다... 아이가 눈뜰까 무서워 진동 알람이 울리자마자 후다닥 조용히 일어난다. 가족들이 깨지 않게 살며시 나와서 아이가 먹을 우유를 데워놓고, 화장실로 들어가 씻는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 일과. 대충 씻고 나와 조용히 골방으로 가려던 나는, 언제 나왔는지 거실에서 우유를 먹고 있는 아이와 딱!! 아오 깜짝이야!
"아빠빠빠빠! 으어어어"
내 다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아빠 회사 일하러 가니까, 회사 일 끝나고 만나자는 약속에 약속을 거듭하고는 사무실 출근 완료.
'후아...' 세 걸음 정도밖에 안 되는 출근길부터 진을 빼고 비즈니스맨의 핫템 다리미판 앞에 앉아, 밤새 쌓인 메일을 열기 시작한다. 그런데 난 꼭 그렇다. 화장실 이야기인데, 스키장에 가서 속옷에 내복에 보드복까지 다 껴입고 나면 가고 싶고, 휴게소에서 나와 고속도로에 다시 진입하면 가고 싶고... 겨우겨우 울고불고하는 아이를 떼놓고 사무실에 들어온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결국 나는 슬그머니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끼이익!" 문이 열리면서 내지르는 비명에 내 심장도 같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WD-40! 어제도 이거 문에 뿌린다, 뿌린다 해놓고 또 까먹었네. 어제의 나를 원망해보지만, 이미 나버린 소리를 어쩌랴. 그래도 나한테만 시끄러운 것 아니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려는 찰나, "아빠아!!"하고 다다다다 달려오는 아이. 문제는, 나는 볼일을 본 뒤 '사무실'로 빠른 귀환을 해야 하는데, 아이는 혼란스러운 거다. '아니, 일하러 갔다가 돌아온 거면 퇴근한 건데 왜 나랑 안 놀고 도망가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붙든다. 원래 누군가를 설득하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던 나는, 이 아이 덕분에 겸손함을 되찾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당최 먹히질 않는다. 내 역량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분이 아니란 걸 알기에, 난 적당히 달래며 슬금슬금 문워크를 하며 사무실로 돌아온다. 다시 어렵사리 방에 들어와 문을 닫으면, 밖에서 방문을 벅벅 긁으며 통곡을 하는 아이. 아이도 울고 나도 울고 회사 업무도 운다.
그뿐인가. 사실 이방은 옷방이었기에, 아내와 아이가 밖에 산책을 가야 하거나, 빨래를 위해 빨래통을 꺼내갈 때 등등, 이방의 문이 열려야만 하는 일 또한 무궁무진하다. 아내가 후다닥 챙겨가려고 들어올 때마다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따라 들어오는 아이는 내 노트북을 뚫어지게 보며, 혼자 방에 박혀서 뭘 하는 건가 하는 눈으로 바라보곤 한다. 그리고 다시 방 밖으로 내보내는 건 또 다른 아픔의 시간이 되곤 한다.
그래서 나는 출퇴근 '세리머니'를 확실히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침에 처음 일하러 가는 시간과 저녁에 일을 마치고 나오는 시간만큼은 확실하게 아이에게 각인을 시키는 인사를 하기로. 아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내가 일을 시작할 때는 방문 앞에 서서 아이와 아내가 마치 집에서 배웅하듯 손 흔들고 인사를 하며, 오늘 서로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를 꼭 하고, 일을 다 마치고 저녁에 방에서 퇴근할 때도, 문에서 나오자마자 아이와 아내와 눈을 맞추며 퇴근인사를 하고, 아이에게 이제부터 네 맘대로 나랑 놀 수 있다는 신호를 반드시 주었다. 그리고 일과 중에 아이와 마주치더라도 몰래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아이에게 짧고 굵게 "안녕~" 하고 인사하고는 '쿨하게' 방으로 돌아왔다. '네가 나를 발견한 건, 보물 찾기에서 일등 상품 발견한 것 같은 특별한 게 아니라, 계속 반복되는 그냥 별 의미 없는 일상인 거야.'라는 메시지를 주려 안간힘을 쓰면서. 이런 노력 덕분인지 점심에 밥 먹거나 중간에 들락날락하는 나를 봐도 시간이 갈수록 조금은 덜 구슬프고 덜 애잔한 눈빛을 주는 것 같다.
아이도 아이지만, 나 스스로도 집에서 일할 때 일과 휴식의 사이에서 느슨해지기 쉬운 마음을 다잡기에도 조금은 더 유용한 방법이기에, 난 어쩌면 골방 표류 시대가 오기 전보다 더 확실한 출퇴근 세리머니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빠는 꼭 돌아올 거야. 그때까지 엄마 잘 보살펴주고, 씩씩해야 된다. 약속?"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주로 떠나는 영화 속의 우주비행사 같은 영웅들은 꼭 이런 대사를 하더라. 그리고는 쿨하게 우주선으로 서서히 사라지고, 가족들은 슬프지만 다시 만나리란 희망으로 눈물을 꾹꾹 누르며 배웅하는 그런 장면들.
그렇다. 나는 지구를 구하기 위해, 좀 더 자세히는 지구 인구 60억 명 중 무려 3명분의 식량을 구하는 고귀한 미션을 위해, 사무실 겸 골방으로 떠나는 거다. 그래서 비록 옷은 잘 때 입었던 목 늘어난 티셔츠에 추리닝 반바지를 입었을지라도, 비장한 모습으로 거창한 인사를 하며 나는 오늘도 골방으로 출근한다.
그동안 우리 거실을 잘 부탁한다. 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