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를 걸어보자.
30여 년 전 회사에 근무할 때 이집트로 출장을 간 적이 있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차창밖으로 멀리 기자의 피라미드를 봤다. 발주처와 면담하고 사업정보를 얻어 와야 하는 짧은 출장기간인지라 피라미드를 먼발치에서만 보고 지나쳐서 아쉬웠다.
30년이 지나 홀가분한 여행객으로 카이로를 찾았다. 여행 첫날 이집트국립박물관을 찾아 이집트의 문화를 주욱 훑어보았다. 이집트 하면 피라미드와 파라오 그리고 미이라와 상형문자가 떠오른다. 이집트를 통일하여 왕국을 통치하던 파라오들은 4600년 전부터 피라미드를 세우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한 사학자들은 당시 이집트 고왕국의 인구는 많아야 수백만 정도로 유추하고 있다. 많지 않은 인구를 동원하여 세운 기자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큰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정사각형 바닥 한 변의 길이가 230.4m이고 높이는 138.8m인데 원래 146.6m였던 것이 풍화작용으로 7.8m가 깎인 셈이다.
기자의 피라미드를 보기 전에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인 사카라의 조세르왕 피라미드를 먼저 찾았다. 최초의 피라미드이다 보니 기술이 부족하여 계단식으로 건설되었다. 사카라는 기자에서 자동차로 40여분 거리에 있다. 근처에는 고왕국의 수도였던 멤피스가 있어 당시 유물을 전시한 야외 박물관을 둘러볼 수도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여러 곳에 산재해 있지만 카이로 외곽 기자 지역에 있는 쿠푸, 카프레, 멘카우레왕들의 피라미드 3개가 가장 유명하다. 카프레와 멘카우레는 각각 쿠푸의 아들과 손자로 약 4500에서 4600년 전에 이집트 고왕국을 통치한 파라오들이다. 지금까지 확인된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약 80개 정도로 사카라, 다슈르, 아부시르, 메이둠 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이 지역은 고왕국이 있던 이집트 중 북부의 나일강과 가까운 지역이다. 사카라의 피라미드에 비해 기자의 쿠푸왕 피라미드는 규모나 세련됨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세련됨이란 말이 4500년 전에 세워진 피라미드에 어울리는 수식어는 아니지만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조세르의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그렇게 느껴진다는 뜻이다.
기자나 사카라의 피라미드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걸어서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직접 걸어보면 그 규모가 피부에 와닿는다. 거대한 인공 구조물을 건설한 파라오는 자신의 사후 세상에 대한 확신을 갖기 위해 살아 있는 동안 대역사를 일으켰을 것이다. 권력과 권위가 클수록 죽음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영원히 권력을 이어가고 싶어 하는 파라오의 신념이 피라미드에 담겨있다는 생각이 든다.
피라미드는 절대 권력자인 왕의 죽음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어두워진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피라미드 뒤로 샛별이 떠 있고 피라미드 앞에는 그 사후세계를 지키려는 듯 스핑크스가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낮에 본 스핑크스와는 달리 조명 탓에 그렇게 보인다. 피라미드의 수호신이며 그곳에 묻힌 주인공을 묘사한 머리에 사자의 몸통을 가진 스핑크스는 절대적이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왕권을 상징한다. 기껏 100년을 못 채우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인간이 수천 년을 변함없이 한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만들었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어둠이 내리자 샛별이 피라미드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46억 년 전 지구와 함께 생겼을 샛별과 수천 년 그 자리에 있어온 피라미드를 바라보니 찰나의 순간을 살아가면서 욕망에 이끌리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